나이를 먹는다는 것
이상하게도 나는 그동안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자각은 크게 하지 않고 살았다. (동안이라는 말을 하도 들어서 그런가??) 그래서 딱히 결혼도 서두르지 않았고(그래서 와이프한테 지금까지 갈굼을 당하지만), 직장인이면서도 남들처럼 치열하게 연봉 1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아둥바둥 살지는 않았다. 때 되면 기회는 주어질 것이고, 너무 안달하지 않아도 시간은 내 편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을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막 성격이 느긋하거나 한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조급한 성격에 가까워서 뭔가 결과물이 빨리 도출되는 걸 훨~~씬 선호하는 타입이긴 하다. 블로그를 개설한지 단시간 안에 순위권 영화 블로거가 될 수 있었던 (과거형!!) 것도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나는 지금 이 나이, 이 시기가 아니면 안 돼 라는 생각으로 뭘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근시안적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무심하게 살았다. 적어도 시간이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 영속적인 것 같은 그런 개념이었던 것 같다.
블로그를 개설한지 어언 17년이 흘렀다. 잠시 뒤를 돌아보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시간을 흘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결혼하고 나서 좀 더 치열해지긴 했지만 삶에 대한 나의 자세는 크게 바뀐 적이 없다. 오히려 블로그가 그간 방치 상태에 가깝게 표류하고 있었던 건 그런 이유가 더 크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라기 보단, 언젠가는 또 글쓰기에 매진할 날이 있겠지 라는 생각에 무심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삶이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는 덤이고.
그러다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의 수가 적어졌음을 느끼게 된 순간부터다. 그러다보니 불안감이 생겼다. 체력이나 몸상태는 분명 예전같지 않고, 직장에서는 어느덧 나보다 8살이나 어린 친구들이 나와 같은 직급으로 승진되거나 같은 직급의 동료가 임원으로 영전이 되는 꼴을 보게 되니 이제 곧 뭔가 삶에 있어서 큰 변화가 찾아올 것은 자명한데, 도저히 피할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나도 이제 단지 나이만 먹는게 아닌, 늙어가는 것이다.
요즘은 나이가 들고 은퇴를 고려할 시점에서 미래를 위한 좋은 선택지를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찾아보게 된다. 나름의 전략과 생각, 실행 방식이 다 다르긴 해도 하나의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선택이 무엇이 되든 그건 이제부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좀 슬프지만 남은 시간이 이젠 많지 않고, 시행착오가 허용될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와이프한테 했더니 대번에 반박이 들어온다. "어떻게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아?"
하지만 생각의 전환을 해보면, 왜 우리는 단지 돈벌이 수단으로만 직업을 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존버는 승리한다"는데, 그건 결국 버티는 것에 방점이 찍힌 결과론적 얘기일 뿐, 버티는 과정에서 망가져 가는 나 자신에 대한 고찰은 빠져 있다. 특히 한국의 직장인들은 은퇴 후 (경제적 여유가 있고 없음을 떠나) 방황하기 쉬운데,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억지로 하고 있으니 그 세월이 겹겹히 쌓이게 되고 결국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건 뭐였는지를 까먹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몇몇 원로 만화가들과 친분이 있다. 대게는 그 분야에서 성공한 분들인데, 경제적으로 이룬 것에서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평생을 보냈다는 것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다. 몇 년전 별세하신 신문수 화백의 마지막 그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만화인생 60년 즐거웠노라!"
내 생각에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교차로는 세 번 정도 찾아오는 것 같다. 한 번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진로를 정할 때, 또 한번은 결혼적령기를 맞이해 결혼을 하거나 혹은 독신의 삶을 살 것인지를 결정할 때 (만약 결혼을 한다면 누구를 배우자를 맞이할 것인지를 선택할 때), 그리고 이제 남은 마지막이 은퇴 후의 삶을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할까 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앞선 두 번의 선택지 보다는 마지막 세 번째 선택지가 가장 힘든 것 같다. 나의 선택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사람이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콘텐츠를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우연찮게 그게 블로그라는 플랫폼을 만나서 블로거가 되었던 것이고, 이 인연으로 또 하나의 직업 작가가 아닌 작가가 되었고 그렇게 글을 쓰는 것의 즐거움을 발견한 케이스다. 문제는 이걸로 뭔가 소득을 대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거지만.
사실... 위에서 빼놓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간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예전만큼의 필력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글도 일종의 가속성이 있는데, 내가 정말 미친 듯이 글을 쓸 때는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양질의 콘텐츠를 뽑아낼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지 않게 되니, 자신감은 물론이거니와 예전만큼의 속도감이 나오지 않아 도저히 글을 쓸 맛이 나질 않는 거다.
가장 최근에 지인인 lennono님의 부탁으로 [외계에서 온 우뢰매] 블루레이 리뷰를 썼을 때도 정말 난처했었다. 그 부탁을 들어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한 것의 절반도 안되는 수준의 졸필 밖에 안 나와줬기 때문이다. 날짜가 촉박해 급한대로 탈고하긴 했지만 지금봐도 이건 좀 미안한 수준의 글이다. 이래서는 안된다.
앞으로의 선택지가 무엇이 되었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찾고, 그걸 해야만 한다는 건 이제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이런 잡담이라도 글을 좀 쓸까 한다. 글쓰는 감각을 되찾고, 어느 정도 블로그에 생기도 불어 넣고 (그래봤자 다 떠난 마당이긴 해도...), 몇 년 전부터 머릿 속에 생각만 하고 있던 책도 집필을 해보고 싶다.
오늘의 잡담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