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FO 로보 그렌다이저 - 엇갈린 마징가 트릴로지의 계보
1970년대 이전에 태어난 분들이라면 [마징가 제트]라는 전설적인 애니메이션을 잘 알 것이다. 시대를 풍미한 슈퍼로봇 컨셉을 만천하에 알린 이 작품은 후속작인 [그레이트 마징가]로 이어지며 승승장구한다. 이어 원작자인 나가이 고와 다이나믹 프로측은 [그레이트 마징가]의 후속작으로 대망의 [갓 마징가]를 기획하지만 막상 제작사인 도에이측은 이러한 마징가 연작 기획에 대해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 永井 豪. All rights reserved.
실제로 도에이는 특촬물 분야에 있어서 일찌감치 [가면라이더]의 원작자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으나 뜻대로 잘 되고 있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역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가이 고와 다이나믹 프로로부터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는데, 그 첫 시도가 1975년 [우주원반 대전쟁]이라는 30분짜리 극장판 애니메이션이었다.
[우주원반 대전쟁]은 외계로부터 온 왕자 듀크 프리드가 갓타이가라는 로봇을 타고 지구를 침략하는 외계군단에 맞서는 내용으로 도에이가 야심차게 추진한 독자적인 작품이었다. 비교적 호평을 받았긴 했지만 문제는 이 [우주원반 대전쟁]을 장기 TV시리즈화 할 독자적인 능력이 아직 도에이에겐 없었다는 점이었다. 매회 등장하는 기계수의 디자인이나 로봇 애니메이션에 대한 여러 노하우에 관한한 다이나믹 프로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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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이는 다아니믹 프로와 나가이 고에게 '스폰서인 포피가 [마징가 제트]와의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던 [그레이트 마징가]에 매우 부정적이다'는 것을 핑계로 [그레이트 마징가]의 후속작으로 [갓 마징가] 대신 [우주원반 대전쟁]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후에 [그렌다이저]로 명명되어 메인 기체의 디자인과 몇몇 설정들을 수정하게 되는데, 이에 대한 다이나믹 프로와 나가이 고의 반발이 매우 거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특히 [마징가 제트]의 주인공 카부토 코지의 경우에는 마징가 시리즈의 연관성을 위해 일종의 사이드킥 개념으로 투입되었는데, 역할의 비중이나 성격에 있어서 나가이 고 판 마징가 시리즈의 핵심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폐성 캐릭터로 전락해버려 훗날 나가이 고는 [그렌다이저]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것을 매우 후회했던 것 같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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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징가 제트]의 경우와는 달리 [그렌다이저]는 다이나믹 프로나 나가이 고의 원작과는 무관하게 애니메이션의 순수 기획인 것이 명백하지만 나가이 고나 오다 코사쿠의 코믹스판도 출간되어 있어서 [그렌다이저]가 나가이 고의 코믹스에 기반을 두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제법 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렌다이저]의 코믹스 버전은 업계의 관행상 미디어 믹스 전략의 일환으로 나온 것으로 보는게 타당한데, 여기에서도 나가이 고는 자신의 색체를 잃지 않았다. 즉, 철저히 도에이의 방식대로 구성된 TV판 [그렌다이저]와 나가이 고의 코믹스판은 전혀 다르다.
일례로 [그렌다이저] TV판은 프라모델의 판매고를 우려한 스폰서, 포피사의 입장을 반영해 다른 마징가가 등장하지 않지만 코믹스판에서는 그레이트와 마징가 제트, 그렌다이저가 한 에피소드에 등장해 협공을 하기도 한다. 나가이 고 특유의 폭주하는 설정도 여전하다. 그레이트 마징가가 탈취당하는 에피소드에서는 듀크 프리드의 고향별이 어떻게 철저히 파괴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베가성의 친위대장 바렌도스는 인질로 잡은 아이들을 하늘에서 자유낙하(?)를 시키는데, 정서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참혹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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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고의 광기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이제 지구에서 듀크 프리드와 재회를 하게 된 바렌도스는 그레이트 마징가를 탈취해 그렌다이저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이번에는 연구소의 식구들과 아이들을 마징가의 본체에 굴비처럼 엮어놓아 그렌다이저의 몸이 마징가에 닿기만해도 묶인 아이들이 처참하게 터져서 죽게된다. 한 때 다이토샤 와이드판을 기초로 한 서울문화사의 나가이 고의 마징가 시리즈는 [그레이트 마징가]까지만 발간이 되었는데, [그렌다이저]가 발간되지 못한 이유가 아마도 이러한 설정상의 문제때문에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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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다 코사쿠의 코믹스 버전에서는 보다 더 많은 분량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TV판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미케네 제국 본진의 상황이라든지 암흑제왕의 최후에 대한 이야기 등이 곁들여져 사실상 [그레이트 마징가]의 후속작으로서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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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실상 마징가 연작의 외전격 성격을 지닌 [그렌다이저]는 도에이의 홀로서기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마징가의 팬들, 특히 나가이 고의 지지자들에게는 흑역사와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 물론 [그렌다이저]는 도에이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훌륭한 스텝과 자원이 활용되었으며 작품 자체로만 보면 꽤나 우수한 퀄리티로 완성되어 있어 작품적인 면모에 있어선 흠잡을데가 별로 없다. 무엇보다 [골드락]이란 제목으로 유럽으로 수출되어 프랑스에서 최종화 시청률 100%라는 전설적인 기록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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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다이나믹 프로에서 마징가 시리즈의 설정을 담당했던 키쿠치 타다아키 (일명: 단 타츠히코)가 '슈퍼로봇대전'의 소설판을 통해 미케네 제국의 암흑제왕과 그렌다이저의 충격적인 상관관계를 밝히는 한편, 원래대로라면 [그레이트 마징가]의 정식 후속작으로서 자리매김했어야 할 '갓마징가'를 부활시킴으로서 [그렌다이저]의 존재를 정통 시리즈에서 지워버리기에 이른다.
한편 키쿠치 타다아키 '슈퍼로봇대전'의 소설판은 '갓 마징가'를 최강의 마징가로 내세웠지만 일러스트를 맡은 이시가와 켄이 자신의 또다른 작품인 '마징카이저'의 디자인을 갓 마징가에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이 두 기체가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따라서 게임 속에 등장하는 이벤트성 기체 정도로만 알려졌던 '마징카이저'는 '갓 마징가'의 설정과 결합해 마징가제트와 그레이트 마징가에 이어 그렌다이저를 대신할 궁극의 마징가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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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그렌다이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이 있으나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다음 2부에서는 1부를 바탕으로 해서 좀 더 흥미로운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P.S:
1.[그렌다이저]의 국내 방영은 TBC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1980년 7월 13일 조기종영의 비운을 맛본다. 일각에서는 1980년에 실시된 언론통폐합의 결과로 TBC 자체가 공중분해되면서 종영된 것으로 나와있는 기록도 있는데, 1980년 7월 20일부터 같은 시간대의 TBC에서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의 재방영이 시작되었으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언론통폐합은 몇 달 뒤인 1980년 11월에 실시)
또 한 편으로는 '로봇(혹은 SF)만화가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정서를 심어준다'는 군사정권의 (아이러니한) 방침 덕택에 조기종영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MBC에서는 [우주전함 V호]가, TBC에서는 [독수리5형제]가 각각 [그렌다이저]의 종영 뒤에도 방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렌다이저] 종영 이후 정규 방송에서 한동안 로봇 애니메이션이 편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유럽에서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2005년에는 이탈리아의 한 팬사이트에서 [그렌다이저]의 실사판인 [The UFO]의 컨셉아트와 예고편을 공개하기도 했다.
3.[마징카이저]에 대해서는 별도의 포스팅을 해야 할 만큼 여러가지 사연이 많다. 간략하게만 언급하자면, [그렌다이저]를 배제하고 마징가 3부작의 최종작에 대한 멋진 설정을 얻게 된 다이나믹 프로는 [마징카이저]의 애니메이션화 계획에 착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TV판 마징가 시리즈에 대한 판권을 쥐고 있는 도에이와의 관계회복이 용이하지 않아 결국 독자적인 컨셉으로 별개의 OVA를 제작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키쿠치 타다아키의 컨셉은 상당부분 희석되었고, 결과는 아시다시피 [마징가제트]의 리메이크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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