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링 러브 - 영화로 보는 빙상 스포츠 컬링의 묘미
제가 일본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그리고 일본영화를 부러워하는 이유는 흥행여부를 불문하고 다양한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는 점입니다. 워낙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다보니 때에 따라선 좀 엽기적이거나 정서적으로 심한 거부감을 느끼는 작품들도 종종 눈에 띕니다만, 반대로 왜 한국에서는 저런 영화를 못만드나 싶을만큼 탐나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배움의 미학'을 강조하는 작품들을 보면 참 저런 소재로도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요.
오늘 소개할 [컬링 러브]는 배움의 과정을 통해 인물간의 갈등을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스윙걸즈]나 [쉘 위 댄스?] 같은 작품들과 비슷한 맥락을 유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감독인 나카하라 슌이 야구치 시노부나 수오 마사유키 처럼 이 방면에서 천부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은 아닌지라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는 썩 높은 편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컬링 러브]를 꼭 소개하고 싶은건 이 작품이 다른 영화들에서는 다룬 적이 없는 독특한 스포츠를 소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컬링'이라는 종목인데요, 아마 국내에도 컬링을 접해봤거나 혹은 시합 장면을 관람한 분은 아주 극소수일거라고 생각됩니다. 컬링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뭐랄까... 그래요, [컬링 러브]의 대사 가운데서 인용하자면 '얼음판의 볼링' 같은 게임입니다. 그렇다고 핀을 세워놓고 공을 굴려 넘어뜨리는건 아니고 4인(리드,세컨드,서드,스킵)이 한팀이 되어서 1인당 2번의 투구를 하게 되는데, 스톤이라고 불리는 묵직한 원반형 물체를 얼음판에 슬라이딩 시켜서 정해진 원 안쪽에 가깝게 위치시키는 경기가 되겠습니다.
ⓒ エスピーオー/プログレッシブ・ピクチャーズ. All rights reserved.
근데 이게 스톤만 굴린다고 되는게 아니고 스톤 브러쉬라고 화장실 청소할 때 쓰는것과 비슷한 솔을 들고서 미끄러져가는 스톤 앞의 얼음을 열심히 문질러서 스톤이 더 잘 굴러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같은 팀의 2명이서 서포트를 해줘야 하지요. 또 공격과 디펜스라는 개념도 있어서 상대방이 던진 스톤을 맞춰서 원안에서 밀어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건 마치 당구와도 비슷하달까요. 아무튼 컬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 접할 수만 있다면 굉장히 재밌을 것 같은 빙상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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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컬링 러브]의 내용을 잠시 소개해 보죠. 한국 컬링 국가대표팀의 스킵을 맡고 있는 이진일(김승우 분)은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덕분에 팀의 패배를 자초합니다. 결국 그는 감독에게 질책을 받고 일본으로 훌쩍 떠나죠. 한편 일본에서 영화배우를 하고 있는 이즈미(후키이시 카즈에 분)는 만년 단역신세를 벗어나고 싶어서 인기스타와 스캔들이라도 내서 유명해지자는 생각을 갖고 있는 아가씨입니다.
어느날 이즈미는 우연히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한류스타 강수형을 만나게 되는데, 실은 이 남자가 강수형과 쌍둥이처럼 꼭 닮은 이진일이었던 겁니다. 진일은 자신이 강수형과 닮았다는 걸 이용해서 길가는 일본 여자나 꼬셔볼까하는 못된 생각으로 접근했던 거죠. 결국 이즈미는 진일에게 깜쪽같이 속아 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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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자신이 만났던 남자가 인기스타 강수형이 아니라는 걸 알게된 이즈미는 격분하지만 옆에 있던 진일의 후배가 간신히 진정시키고 술자리를 함께 하다가 유명해지고 싶다는 이즈미에게 그럼 차라리 컬링을 시작해서 올림픽대표로 출전해 유명해지라고 제안합니다. 이 제안에 솔깃한 이즈미는 고향친구인 히카리, 유코, 사토코와 함께 컬링을 시작하게 된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영화는 컬링이라는 생소한 종목을 비교적 알아듣기 쉽게 설명함과 동시에 생초보인 주인공들이 컬링을 배워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어서 저같은 문외한도 '컬링 한번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 정도입니다. 비인기종목도 알고보면 참 재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달까요. 특히 컬링이란 경기는 선수 한사람의 재량이 아니라 모두가 합심해서 역할을 분담해야 이길 수 있는 단체 경기라는 주제전달도 나름 괜찮습니다.
또한 보통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은 경기 내용의 박진감이나 승패의 드라마틱한 연출에 신경을 쓰기 마련인데 [컬링 러브]에선 그런 것 보다도 주인공의 성장과 로맨스 부분에 더 초점을 둔 점도 잔잔한 연출이 특징인 일본영화답습니다. [국가대표]나 [우생순]같이 비인기종목 선수들의 애환이나 설움같은 감정을 자극하는 우울한 테마도 전혀 찾아볼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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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지껏 한일합작영화치고 제대로 성공한 작품이 없었는데요, [컬링 러브]도 그 전례를 크게 벗어난 작품은 아닙니다. 실제로 [컬링 러브]의 내러티브를 뜯어보면 다른 비슷한 부류의 일본영화들에 비해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애초에 강수형과 이진일이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는 것도 억지스런 설정입니다만 (얼굴에 점하나 찍는다고 다른 사람이라니, 무슨 [아내의 유혹]도 아니고.. ㅠㅠ) 초등학생들과 노인으로 이뤄진 팀한테도 깨지는 오합지졸팀이 고작 몇 달 배워서 국가대표 출전자격을 딸 수 있다면 그게 어디 국가대표인가요? 아무리 특훈을 받았다지만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지요.
게다가 주인공 남녀의 관계발전이 너무 비약적인 측면도 없지 않아요. 자고로 남녀가 사랑에 빠지려면 무언가 결정적인 이벤트가 터져줘야 하는데 그런 절차를 무시하고 사랑에 골인하는 당위성에 조금은 공감하기 힘듭니다. 결정적으로 후키이시 카즈에(전 이 처자만 보면 꼭 제니퍼 러브휴잇이 연상되더군요)의 상대역으로 김승우는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이죠. 뭐 욘사마 같은 꽃미남 한류스타가 배역을 맡기엔 캐릭터 자체가 적당히 악당스런 면도 있어서 무리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두 주연배우의 앙상블이 썩 좋은 프레임을 보여주는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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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컬링 러브]는 컬링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배움의 열정이라는 흥미로운 내러티브와 접목시킨 로맨틱 코미디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비록 국내에서는 극장 개봉도 못하고 공중파 방송으로 직행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의 성격상 흥행성을 낙관하지 못한 극장가의 현실 때문이지 이 영화가 재미없어서는 아니니까요.
한국에서는 2007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남녀 컬링팀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거두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이번 2010 동계올림픽에는 출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컬링은 이번 올림픽 개최지인 캐나다에서도 무척 인기있는 스포츠라고 하는데요, 흥미로운 점은 강력한 우승후보인 캐나다의 컬링 국가대표 5명 중 한명인 크리스티 무어가 현재 임신 5개월의 몸으로 출전을 해 경기를 소화해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컬링이라는 스포츠는 격렬하지 않으면서도 동계 스포츠 중 가장 과학적인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임산부도 충분히 시합에 참가할 수 있다는군요. 이번 무어의 출전은 동계 올림픽 역사상 3번째 임산부의 출전이라고 합니다.
한국팀이 빠진 가운데 컬링 시합 중계를 얼마나 보여줄 것인지는 미지수입니다만 2월 26일부터 남녀 준결승전이 시작되며, 이튿날인 27일에는 여자 금메달 결정전, 그리고 28일에는 남자 금메달 결정전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이번 2010 동계올림픽을 시작으로 저도 앞으로는 컬링 시합을 꼭 시청하게 될 것 같습니다.
P.S: 이 작품의 원제는 '멋진 밤, 내게 주세요 素敵な夜、ボクにください'인데, 주인공인 진일이 이즈미를 꼬실때 처음 쓰는 말입니다. 뭐 결국엔 프로포즈할 때도 쓰는 말이긴 하지만요. 반면 영어 제목이자 국내 방영명인 '컬링 러브'는 중의적인 의미인데요, 컬링으로 이루어진 사랑이란 뜻이기도 하지만 가드된 스톤과 그 옆을 지나가는 스톤이 닿았을 때 쓰는 컬링용어가 바로 '러브 Love'입니다. 주인공 진일과 이즈미가 동일한 실책을 범하게 되는 바로 그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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