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트맨: 가면의 환영 - 슈퍼히어로의 존재론적 딜레마를 조명한 애니메이션
팀 버튼의 [배트맨]이 배트맨의 세계관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배트맨]의 안티히어로적 성향은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본질적인 자아를 훌륭하게 재현한 것이었으며, 시리즈가 가진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후속작 [배트맨 리턴즈]는 팀 버튼의 키치적 성향과 우울한 분위기가 지나치게 두드러지는 바람에 원작의 팬이나 영화의 팬들에게 있어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켰다. 영화의 제작진은 [배트맨 리턴즈]의 음울함에 난색을 표했고, 이는 [배트맨 포에버]가 60년대 TV시리즈의 '캠피(Campy) 스타일'로 회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배트맨 리턴즈]가 원작과는 다른 팀 버튼의 '컬트적 배트맨'으로 변모해 논란이 될 무렵, 배트맨의 팬들은 의외의 작품에서 배트맨 프렌차이즈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팀 버튼의 [배트맨]이 성공을 거둔 이후 워너사에서 계획한 [배트맨 TAS(The Animated Series)]가 그것이었다. 여지껏 수없이 많은 형태로 제작된 배트맨 애니메이션과는 달리 [배트맨 TAS]는 팀 버튼이 보여주었던 어두운 고담시의 분위기와 원작이 추구했던 탐정 느와르의 스타일이 혼재된 작품으로서 영화의 팬들과 원작의 팬들 모두를 만족시켜줄만큼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 Warner Bros. Animation. All Rights Reserved.
총 85화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배트맨 TAS]는 (국내에서도 SBS를 통해 방영됨) 훌륭한 성우 캐스팅과 개성있는 악당의 등장('할리 퀸'이 처음 등장한것도 이 시리즈를 통해서다), 탄탄한 스토리로 팬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특히 영화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여러 악당들의 기원이 설명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세밀한 캐릭터 묘사가 가능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배트맨 리턴즈]의 실패 후 1년뒤에 개봉된 [배트맨: 가면의 환영]은 [배트맨 TAS]의 1시즌이 성공적으로 방영된 이후 기획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서 잘 짜여진 구성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가면의 환영]은 그래픽 노블인 "Batman: Year One"과 "Batman: Year Two"을 참고하였는데, 주로 브루스 웨인의 초기 활동과 환영의 가면을 쓴 암살자의 캐릭터에서 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배트맨: 가면의 환영]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고담시 마피아의 보스가 하나 둘 씩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현장에는 망토를 두르고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이 목격되는데, 사람들은 그를 배트맨으로 오인한다. 살인을 하지 않는 배트맨은 졸지에 경찰로부터 살인범으로 몰리게 되고 브루스 웨인은 현장에 남겨진 단서를 근거로 수수께끼의 암살자를 색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와중, 과거 브루스의 약혼녀였던 안드레아 뷰몬트와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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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살아남은 마피아 보스 살바토레는 여전히 배트맨이 자신을 노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배트맨의 숙적 조커를 고용하게 되고, 브루스 웨인은 사건을 조사하는 도중 안드레아의 부친 칼과 살해당한 마피아의 보스들, 그리고 현직 시장인 아서 리브스와 젊은날의 조커가 이 연쇄 살인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모종의 일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리고 환영의 가면을 쓴 암살자의 정체에 한걸음 다가서게 되는데....
[배트맨: 가면의 환영]의 스토리에서 느껴지듯이 마피아 보스들의 살인사건에 연루된 배트맨의 수사과정에 초점을 맞춘 이 작품은 여기에 과거의 연인 안드레아와 브루스의 멜로라인을 첨가해 보다 어른들의 취향에 가까운 플롯을 선보였다. 이에 더해 배트맨의 기원과 아직 배트맨으로 활약하기 이전, 자경단으로서 활동할 당시 브루스의 모습이 소개되며, 안드레아와의 결혼까지 결심했던 브루스 웨인이 왜 배트맨으로 거듭나게 되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진진한 부분이다.
또한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적 고뇌가 영화판보다도 더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부모님의 무덤을 찾은 브루스 웨인이 어둠의 기사가 될 것인가, 사랑하는 여인과의 행복을 택할것인가를 놓고 빗속에서 절규하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인데 이는 마치 영화 [슈퍼맨 2]에서 주인공 클락이 로이스를 위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쪽을 선택하는 슈퍼맨을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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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가면의 환영]은 배트맨의 숙적 조커가 등장한다는 점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할 것이다. 여기서 조커의 성우는 [스타워즈]의 영원한 루크 스카이워커, 마크 해밀이 맡았는데 이미 [배트맨 TAS]를 통해 조커 역을 소화해 온 그는 한동안의 침체기를 벗어나 성우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의 조커 역이 얼마나 매력적이었으면 훗날 [다크 나이트]의 새로운 조커 역에 (배우로서는 한물간)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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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버튼의 [배트맨]이 그랬듯, 슈퍼히어로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이룩했던 [배트맨 TAS]는 이후 [배트맨 NBA(The New Batman Adventures)], [배트맨 비욘드] 등으로 이어졌고, 1998년과 2008년 사이에 [Batman & Mr. Freeze: SubZero]를 포함한 무려 5편의 OVA가 제작되었으나 아직까지도 [배트맨 TAS]나 [가면의 환영] 만큼의 평가를 받는 작품은 없다.
2008년 [다크 나이트]로 다시금 브루스 웨인의 비극적인 숙명이 부각된 지금,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박쥐 가면을 쓴 안티히어로 배트맨의 또다른 이야기 [가면의 환영]은 배트맨의 세계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의미깊은 작품이 될 것이다. 단, 일본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당신이 양키 센스를 참아낼 수만 있다면 얘기지만.
* [배트맨: 가면의 환영]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Warner Bros. Animation.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배트맨: 가면의 환영]의 원제는 [Batman: Mask of the Phantasm]으로 TV방영시 제목을 인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