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F가 된다 - 색다른 이과적 미스터리의 세계
가끔씩 일본산 추리물을 즐겨보긴 하지만 같은 추리물이라 하더라도 영미권의 고전 정통 추리물과는 달리 일본의 작품들에서는 엽기성과 폐륜적인 코드가 종종 발견되어 때론 부담감과 불편함을 느낄 때 많다. 그럼에도 쉽게 일본 추리물을 끊을 수 없는 건 발상의 기발함과 트릭의 참신성에서 기인하는 일종의 금단증상. 마치 불량식품이 몸에 나쁜 걸 알면서도 계속 먹게되는 것 처럼.
언젠가 쿄고쿠도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망량의 상자]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는데, 애니판에 대한 세간의 호불호와는 별개로 섬뜩하면서도 기묘한 사건을 시각적으로 훌륭하게 표현한 연출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분위기의 애니메이션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실패. 적어도 미스터리 분야에서 애니판 [망량의 상자]는 탑클래스급 작품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여지없이 깨 버린 작품을 만났다. 역시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모든 것이 F가 된다]이다. 개인적으로는 노이타미나 시간대에서 건진 작품들이 제법 되는 편인데, 언제부터인가 라인업에 잠시 신경을 끄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았던 그런 작품이 되겠다. 원작은 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S&M이 아니다 -_-;;;) 중 첫 번째 작품으로 이미 실사판 드라마로도 방영된 바 있지만 워낙 혹평이 많아 자연스럽게 애니화 소식도 무신경했던 것도 있다.
본 시리즈의 주인공은 국립 나노고 대학교의 건축학과 부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1학년생 니시노소노 모에다. 어느날 이들은 천재 과학자 마가타 시키를 만나기 위해 외딴 섬으로 향한다. 11세에 박사 학위를 따낸 마가타 박사는 14세에 양친을 살해한 살인자이자, 다중인격의 소유자. 15년째 외딴 섬의 연구소에 격리된 그녀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 앞에 사지가 잘려나간 채 신부복을 입고 있는 기묘한 시체로 나타난다.
첨단 시스템으로 자동화 된 연구소와 외부인의 출입이 어려운 외딴 섬. 완벽하게 통제된 마가타의 방과 이를 감시하고 있는 CCTV. 침입자가 들어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발생한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남겨진 유일한 단서는 마가타 박사가 자신의 컴퓨터에 남겨 놓은 한마디 “모든 것이 F가 된다”.
[모든 것이 F가 된다]는 다분히 이과적 추리가 개입된 미스터리로서 1996년에 발표한 원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탄탄한 IT이론과 트릭을 사용한 작품이다. 사실 일본 특유의 엽기성과 폐륜적 코드가 여전히 찝찝한 충격을 던지긴 하지만 또 그걸 이용해 희대의 밀실 트릭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온다.
내러티브의 중간에 마가타 박사의 과거사를 짧게 쪼개 넣는 액자식 구성의 연출이 인상적이며, 일정한 퀄리티를 꾸준히 이끌고 가는 작화, 카와이 켄지의 훌륭한 음악 등 미학적 부분에서의 완성도도 뛰어나다. 특히 사이카와 교수와 니시노소노가 새벽녘에 대화를 나누면서 서서히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기술적 성취를 다시 한번 절감할 수 있다.
다만 사건 해결에 필요한 이과적 지식이 대중적 취향을 흡수하는 면에 있어서 일종의 방해요소. 게다가 캐릭터 디자인이 비교적 사실적인 편이라 미화된 캐릭터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비호감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취향을 탈 수 밖에 없는 작품이나 추리극에 대한 내성이 어느 정도 생긴 이들에게는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다가올 만한 추천작이다. 후속편의 제작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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