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 제니시스 - 무게감을 던져버린 평범한 액션영화
[터미네이터]는 1,2편으로 완벽한 종결이 이루어진 영화입니다. 감독판을 보면 그런 확신은 더 강해집니다. 이쯤되면 더 이상의 후속편이 얼마나 쓸데없는 사족인지를요.. 조나단 모스토우의 [터미네이터 3]나 맥지의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은 어찌보면 태생부터가 서자의 운명을 벗어나기 힘든 영화입니다. 이런 식으로 인공호흡기를 달고 기사회생한 시리즈는 기껏해야 [분노의 질주] 정도일 겁니다.
그럼에도 계속되는 시리즈가 시도되고 만들어지는 건 그만큼 [터미네이터] 프렌차이즈가 가진 상품적 가치와 세계관이 내포하고 있는 잠재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2019년에는 판권이 제임스 카메론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그 전에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기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이 조바심 때문에 늘 결과가 안좋아지는 것이겠지만요.
2편의 스토리에 안일하게 묻어가려했던 3편과 전편을 어설프게 아우르며 미래 세계 3부작을 시도하다 실패한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과는 달리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흑역사가 된 전작 두 편을 무시하고 리부트를 선언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스카이넷이 T-101을 1984년으로 보낸 미래세계를 기준으로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합니다. 소위 패러렐 월드라 불리는 평행우주 이론이죠.
원래대로라면 미래에서 온 카일 리스가 터미네이터에 쫓기는 사라 코너를 보호하고 우여곡절끝에 둘 사이에 사랑이 싹터 존이라는 결실을 갖게 되지만 이 작품에서의 카일은 영문도 모른채 T-1000에게 쫓기다가 사라의 도움으로 구출되고 알고보니 사라는 훨씬 더 전에 온 터미네이터에 의해 보호받고 여전사로 성장했더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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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습니다. 카메론의 1,2편을 존중하면서 새 판을 짜려고 한 고심의 흔적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에요. '터미네이터'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 진지함이 실종된 이 작품은 시종일관 시시껄렁한 유머와 패러디에 가까운 오마주, 그리고 젊은 남녀의 밀당과 같은 우스꽝스런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시리즈의 성격을 규정짓는 추격전의 처절함과 서스펜스도 실종되어 있을 뿐더러 이 작품에서 가장 고심했을 타임슬립물의 플롯도 뭔가 복잡하게 만들다가 중간에 포기하고 던져버린 느낌입니다.
물론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 만족하는 관객도 있으리라 봅니다. 1,2편의 향수를 불러오는 몇몇 장면들과 설정은 너무 멀리나가 버린 이전의 두 작품에 비해 훨씬 더 카메론의 작품에 가깝거든요. 그렇다 해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대자본이 투입된 팬무비 이상의 가치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CG의 엄청난 발전으로 인해 구현할 수 있는 상상력의 한계가 무한대로 늘어났음에도 액션의 규모나 질감이 아날로그 시절의 1,2에 미치지 못한다는 건 좀 심각한 문제죠.
캐스팅에 있어서도 호불호가 갈릴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사라 코너 역의 에밀리아 클라크나 존 코너 역의 제이슨 클라크는 꽤 맘에 듭니다만 카일 리스 역의 제이 코트니는 심각할 정도로 미스 캐스팅입니다. 일단 주인공의 외모부터가 몰입이 안될 뿐더러 캐릭터 해석도 너무 빗나갔습니다. 의심스럽다면 지금이라도 [터미네이터] 1편을 다시 꺼내 보세요. 경찰서 취조씬에서 절규하는 마이클 빈의 연기를 보면 제이 코트니가 연기한 수다쟁이 카일 리스와 얼마나 큰 괴리감이 있는지를 실감하실 겁니다.
결론적으로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는 무게감을 던져버린 평범한 액션영화입니다. 의무감만으로 보기엔 시리즈의 기본 골격을 너무 경량화 시켜버려 본연의 맛을 거의 잃어버렸지요. 노쇠한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터미네이터를 다시 보는 건 늘 즐겁지만 이젠 그도 이 역할을 놓아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 그대로 '터미네이터'라는 제목처럼 그의 존재감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캐스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네요.
P.S
1.이병헌의 T-1000은 의외로 로맨틱하지 않더군요. 적당한 분량에 적당한 존재감이었네요. 오히려 너무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 좀 측은...
2.[터미네이터]에서 카일 리스가 존 코너에게서 받은 사라 코너의 사진은 사실 터미네이터의 급습을 받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불에 타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타임슬립을 하는 그 순간까지 간직하고 있더군요. 만약 이 작품이 1,2편을 그대로 연계한 작품이라면 엄연한 옥의 티죠.
3.한 가지 확실한 건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은 버렸다는 겁니다. 카일 리스와 존 코너의 첫 대면을 완전히 바꿔 버렸지요. 기획 단계에서는 크리스타나 로켄의 T-X 를 컴백시킬 생각도 한 모양인데 그렇다면 [터미네이터 3]까지는 어떻게든 끌어 않을 생각이지 않았나 하는 망상도 듭니다.
4.쿠키 화면이 있으니 스탭롤이 올라갈때까지 자리를 뜨지 마시길.
5.J.K 시몬스가 다음 작품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이번에는 왜 출연했나 싶을 정도네요. 아마 본인도 [위플래쉬]를 통해 그 정도로 뜰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6.로버트 패트릭의 카메오씬이 병원 대결씬에서 나온다는데 저는 못봤습니다. IMDB의 크래딧에서도 찾아볼 순 없더군요.
7.아놀드가 웃통을 까지 않은 최초의 터미네이터 입니다. T-101은 다른 배우가 연기한 보디 더블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에서 아놀드 전 주지사의 터미네이터에 한계를 느꼈습니다.
8.영화가 끝나고 브래드 피델의 메인테마가 울려 퍼집니다만... 영화와 참 안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2편에서는 완전 맞춤 음악이었는데 말이죠.
9.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크래딧상 역할은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가디언'입니다.
10.영화관에서 나오는 엘리베이터에서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영화의 배경을 설명해 주더군요. 1편은 아놀드가 사라를 죽이러 온다. 2편은 T-1000이 존을 죽이러 온다 등등.. 그걸 듣던 아들의 말, "2편에도 이병헌이 T-1000으로 나오나요?" 뭐랄까... 내가 확실히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걸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음 메인으로 올라갔네요. 딱히 잘 쓴 리뷰도 아닌데...좀 민망합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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