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트 원티드 맨 - 포스트 911 시대의 고급 스파이물
[모스트 원티드 맨]은 작년 소리소문없이 국내 개봉한 영화 중에서 탑클래스에 들만큼 뛰어난 수작입니다. 원작은 스파이물의 거장 존 르 카레의 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죠. 흔히들 존 르 카레의 스파이물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실성'에 있다고 합니다.
이언 플래밍의 007 판타지가 첩보물의 흐름에 큰 영향을 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로서 보여질 수 있는 오락적인 재미를 추구했을때의 일이고, 진짜 첩보전의 냉혹함과 살풍경한 느낌을 전달하는 건 역시나 존 르 카레의 작품들이지요.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보세요. 구시대 냉전체제 하에서의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요즘 기준으로 봐도 전혀 후지지 않고 얼마나 현실적인가를.
[모스트 원티드 맨] 역시 이러한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 세계의 등장인물들은 더는 동서양으로 양분된 냉전시대의 사람들이 아니지만 911사건 이후 미국과 무슬림 세력으로 재편성된 긴장구도에서 더 큰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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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테러분자로 지명수배된 무슬림 청년을 둘러싼 첩보원들의 각축전이 무미건조하면서도 실감나게 묘사된 이 영화는 처음엔 매우 느릿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서는 굉장히 농밀한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인물간의 묘사와 첩보전의 전개양상이 007류의 액션첩보물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생소하게 와 닿을수도 있습니다만 영화적 완성도나 드라마의 치밀함에 있어서는 2014년 최고의 수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배우들의 열연또한 무시무시합니다. 작고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완성된 마지막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데, 나이 50도 넘기지 못한 그가 이 정도의 속 깊은 연기 내공을 보여준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여기에 윌렘 데포, 로빈 라이트, 레이첼 맥아담스 같은 탄탄한 조연들이 한치도 과장되지 않은 진중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줍니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알려진 맥아담스는 이런 스릴러에도 꽤 잘 어울리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지요.
말이 필요없습니다. 이 영화는 그간 잊혀졌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잇는 정통 첩보물의 계보에 놓인 적자입니다. 총성 한번 울려퍼지지 않지만 그 서늘한 스릴만큼은 그 어떤 첩보영화보다도 더 차갑게 와닿습니다. 마지막 엔딩의 그 허무감과 여운은 근래 보아온 영화 중에서 가장 강도높은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P.S:
1.아직 구체적인 소식이 들려오진 않지만 이렇게 되면 [스마일리의 사람들]이 기대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제 DNA는 이언 플레밍보다는 존 르 카레 쪽에 가까운거 같습니다.
2.[아메리칸]에서 이미 건조한 스릴러를 매끈하게 연출한 안톤 코르빈 감독은 이번에도 이 분야에 꽤 소질있는 연출가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감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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