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 - 아기공룡 둘리, 그 씁쓸한 뒷담화
속편열전(續篇列傳) 번외편
미국의 미키 마우스나 일본의 도라에몽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캐릭터의 필요성이 대두될때마다 늘 거론되는 작품이 있으니 김수정 화백의 [아기공룡 둘리] 입니다.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한 이 작품은 1983년 만화월간지 '보물섬'의 간판코너로 군림하며 단행본 10권의 분량으로 완결되어 TV애니메이션과 극장판, 그리고 수많은 캐릭터 상품으로 오늘날의 '뽀로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요.
평범한 샐러리맨 고길동의 집에 나타난 공룡 둘리, 깐다삐야별에서 온다삐야별로 이동 중에 지구로 불시착한 외계인 도우너, 서커스를 탈출한 타조 또치, 외국으로 나간 친척이 맡긴 아기 희동이, 옆집에 이사온 가수지망생 마이콜 등 다채로운 개성만점의 인물들이 좌충우돌 소동을 벌이는 [아기공룡 둘리]는 만화가 천시받던 사회풍조에도 불구하고 전 연령대에 걸쳐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기공룡 둘리]의 후일담은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2003년, 최규석 작가가 영점프를 통해 '2003 둘리'를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어른이 된 둘리와 그 주변인물들이 겪는 고통과 좌절의 현실을 담아낸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후에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라는 단편집으로 재발간된 이 작품은 산업재해로 인해 손가락을 잃은 둘리와 도우너에게 사기당해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난 고길동, 삼류깡패가 되어버린 희동이 등 주요 캐릭터들이 철저하게 파괴된 모습을 그렸습니다.
ⓒ 최규석/ 길찾기.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정작 더 우울한 사실 한가지는 '2003 둘리'의 내용보다도 이 작품을 [아기공룡 둘리]의 후속작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2003 둘리'는 성인이 된 둘리와 친구들의 모습을 담고는 있지만 단행본의 제목에서 알려주듯 어디까지나 오마주이지 정식 후속작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원작자인 김수정 화백과 최규석 작가는 '2003 둘리'에 대해 어떠한 논의를 한 적도 없으며,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의 추천사에서 밝히듯 김수정 화백은 '2003 둘리'가 발표되고 나서야 이 작품의 존재를 알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이미 김수정 화백은 자신의 이름으로 [아기공룡 둘리]의 정식 속편을 이미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소년챔프에 연재된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 (일명 B.S 돌리)입니다. 이 작품은 전작인 [아기공룡 둘리]의 인기와는 대조적으로 인지도면에서 거의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럼 먼저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를 살펴보기에 앞서 [아기공룡 둘리]로 돌아가 이 작품이 어떻게 끝을 맺는지 부터 언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작의 마지막에서 둘리는 남극으로, 도우너는 깐다삐야 별로, 또치는 아프리카로, 희동이는 부모가 사는 미국으로 각각 돌아갑니다. 이 중에서 둘리만이 서울로 돌아와 (편안해서 뒤룩뒤룩 살찐) 고길동을 붙잡고 다시 받아달라며 하소연을 하지요. 결국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둘리는 고길동의 집에서 살게 된다는 훈훈한 마무리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 김수정. All rights reserved.
이 부면에서 최규석 작가의 '2003 둘리'는 설정의 오류-이를테면 깐다삐야로 돌아간 도우너가 길동에게 사기를 치는 건 상식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를 범하고 있는 반면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는 전작의 엔딩과 이어지는 설정을 보여줍니다. 둘리는 퉁순이와 결혼해 세파에 찌든 공인중개사가 되었고, 허영심 많은 또치는 아프리카로 돌아간 이래 맹수에게 쫓겨다니는 험란한 세월을 보낸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마이콜은 가수의 꿈을 버리고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가게 주인이 되었으며, 고향별로 돌아간 도우너만이 그나마 민족의 영웅 취급을 받으며 잘먹고 잘살고 있지요.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는 기성세대로 성장한 둘리와 그 주변 인물들의 후세대들이 등장해 다시금 소동을 벌이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둘리에게는 돌리와 올리라는 두 자녀가 있고, 또치에게는 꼬치라는 딸이, 마이콜은 가수가 되겠다고 난리를 치는 아들 마이돌이, 그리고 도우너에게는 호도그라는 아들이 각각 있는데, 이들이 벌이는 말썽의 수준은 이미 부모세대의 수위보다 한층 더 높습니다. 버릇없고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전작들의 캐릭터와는 달리 새로운 캐릭터들의 막나가는 행동과 성격은 [아기공룡 둘리]에 열광했던 연령층에게 상당한 거부감을 낳았을 거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따라서 결국엔 조연으로 설정된 둘리가 다시금 주연급으로 회귀하는 현상도 보입니다.
또한 [아기공룡 둘리]가 1980년대의 시대상과 의식수준을 반영해 공감을 얻는 작품이었다면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는 이미 일본만화의 유입으로 인해 만화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게 된 1990년대에 80년대의 정서를 들여와 이를 동어반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대착오적인 작품이 되었다는 얘기죠. 때론 블랙코미디적인 유머가 작품 속에서 빛을 발했던 [아기공룡 둘리]였지만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의 유머는 어둡다 못해 우울함마저 묻어 나옵니다. 아마 이 당시 개인사로 큰 어려움를 겪던 작가 자신의 심리 상태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는 실패한 속편이 되었습니다. 작가 자신에게 엄청난 성공을 안겼던 [아기공룡 둘리]의 후속작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하고 급조된 듯한 마무리와 함께 이 작품은 점차 흑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촉망받는 명랑만화가의 선두주자로 기대를 모으던 김수정 화백의 커리어도 이 작품과 [티처 X]로 사실상 하향세에 접어 들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에는 국제적인 마스코트로 내세울만한 대표 캐릭터가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둘리여야 할 이유는 지금에 와서 많이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둘리라는 캐릭터를 오랜 세월 지속시켜나갈 메인 컨텐츠가 꾸준히 나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한국의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둘리는 오랜 세월을 장수했지만 그 생명력의 원천이 1980년대 [아기공룡 둘리]에 한정되어 있다는 건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비록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가 실패했을지라도 작가 자신에 의해서건 또는 유능한 후배들에 의해서건 다시금 [아기공룡 둘리]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군요.
* 이 글은 만화규장각에 기고한 컬럼을 블로그에 맞게 리뉴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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