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징가 제트: 피라밋 요새의 비밀 - 원작을 능가한 한국산 마징가의 역사
슈퍼로봇물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된 [마징가 제트]는 국내에서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의 원작자가 일본의 나가이 고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나가이 고가 자신의 대표작 [데빌맨]에 주력하기 위해 정작 [마징가 제트]는 날림으로 작업했다는 걸 고려하면 국내에서 맹위를 떨친 마징가의 위용은 실로 기이하기까지 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이에 이 시간에는 국내에 출간된 [마징가 제트]의 역사를 되짚어 봄과 동시에 이번 리뷰의 메인이 될 [마징가 제트: 피라밋 요새의 비밀]을 소개하고자 한다.
국내에 발간된 최초의 [마징가 제트]가 뭔지는 나로서도 잘은 모르겠다. 나가이 고의 원작이 일본에서 발간된 게 1972년이니 국내에 슬며시 들어온 해적판 내지는 대본소용 만화가 존재했을 개연성은 충분하지만 안타깝게도 1972년 이후의 시기는 정 모군 자살사건으로 촉발된 '만화 대학살'이 자행된 이른바 암흑기로서 이 무자비한 학살기간에 살아남은 국내 만화판본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975년 8월 11일 부터 국내 MBC TV를 통해 첫 방영이 된 시점 이후로 [마징가 제트] 관련 만화들이 쏟아져 나온 것만은 확실하다. (선정우 저 <슈퍼로봇의 혼>에 의하면 1974년 경 잡지에 연재된 오타 고사쿠 판이 있다고 언급되어 있다)
[마징가 제트] 최초 방영시 소개 기사
그 흔적은 1975년 11월, 오타 고사쿠 버전의 [마징가 제트]를 유춘송 작가가 모사한 [마징거 Z] (기린각 발간)에서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최초의 마징가 관련 만화가 아닐까 추정되는 본 작품은 비록 일본 원작을 그대로 베껴서 그린 것이긴 하지만 원작자로 오다 고사쿠의 이름을 넣어 최소한의 상도를 지켰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의외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만화 판본이 나가이 고의 것이 아닌 오다 고사쿠 버전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이 작품은 1,2,3권과 완결편 1,2,3권 총 6편으로 출시되었다.
유춘송 작가의 오타 고사쿠판 [마징거 Z] ⓒ 기린각 All rights reserved.
이듬해인 1976년 1월에는 '소년세계' 별책부록으로 [마징거 Z]가 제공되었다. 이 작품 역시도 정식판권없이 출간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흥미롭게도 원작자에 나가이 고의 이름이 들어가 있어 사실상 이 당시만해도 벌써 [마징가 제트]가 국산이 아닌 일본 것이라는 점은 대중들이 충분히 알 수 있던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년세계에 연재된 [마징거 Z]. 원작자는 나가이 고로 되어있지만 내용은 오다 고사쿠 버전이다. ⓒ 기린각 All rights reserved.
같은해인 1976년에는 이덕송 작가가 그린 [마진Z와 해저왕국]이나 차명수 작가의 [태권 철인]은 [마징가 제트]의 후속작인 [그레이트 마징가]를 모사한 작품이다. 특히나 [태권 철인]은 제목에서처럼 [로보트 태권브이]의 인기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인데, 원래라면 마징가 블레이드를 휘둘러야 할 녀석이 쌍절곤을 들고 있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는다.
그레이트 마징가를 로컬라이징시킨 [마진Z와 해저왕국] (위), [태권 철인](아래) ⓒ 기린각 All rights reserved.
1980년대는 마징가 만화의 전성기였다. 서두원 작가의 [슈퍼보이대 마징가 제트]를 비롯 현대코믹스에서는 총 6편의 마징가 제트 만화가 출간되었고 뒤를 이어,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에서는 전성기의 [마징가 제트 대 기계수군단], 양정기의 [전투수군단 대 그레이트 마징가], 성운아의 [쇠돌이여 마징가 제트를 출동시켜라], [마징가 제트 무적의 로케트 펀치를 날려라] 등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마징가 관련 만화 중에서도 소장가치나 완성도면에서 가장 탁월한 면모를 드러낸 건 스타문고 시절부터 마징가 제트 만화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 온 이세호 작가의 작품들이다. 실제 [달려라 하니]로 너무나도 유명한 이진주 작가의 필명인 이세호 버전의 마징가 시리즈는 원작보다도 훨씬 더 정교한 그림체와 짜임새있는 스토리를 보여주었다.
[마징가제트와 살아난 헬박사], [마징가 제트와 최후의 결전], [그레이트 마징가의 마징가 제트 구출 대작전] 등으로 스타문고에서 마징가 시리즈를 그린 이세호는 현대코믹스로 넘어와 [마징가 제트], [마징가 제트: 피라밋 요새의 비밀], [마징가 제트와 신비의 로보트 미넬바 엑스], [마징가 제트와 찡가 우주를 날아라], [마징가 제트 그레이트 마징가와 합동작전] 등 총 5편의 마징가 시리즈를 추가로 발간했다.
그 중 [마징가 제트: 피라밋 요새의 비밀]은 현대코믹스에서 발간한 마징가 시리즈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마징가 제트와 코크스 일당의 한판승부를 다루고 있는데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각국의 과학자들이 하나 둘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배후에는 코크스라는 이름의 대악당이 있는데, 그는 에너지 기술의 핵심 과학자들을 납치해 이동식 피라밋 요새의 무한 동력을 개발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코크스는 큰 사고를 당한 뒤 사이보그로 재탄생한 밤피라를 앞세워 광자력 연구소를 공격하는데, 일반인들보다 3배에 달하는 뇌파를 지닌 밤피라의 뇌파공격으로 쇠돌이는 마징가를 제대로 조종하지 못해 위기에 몰린다. 이에 쇠돌이는 뇌파공격을 감소시키는 개조헬맷을 쓰고 전투에 임해, 그림자를 이용한 반격에 나서게 된다.
[마징가 제트: 피라밋 요새의 비밀]은 나가이 고의 원작에서 보지 못한 이세호 작가의 세계관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마징가의 메인 빌런인 헬박사 대신 코크스라는 인물(이 코크스는 [마징가 제트와 찡가 우주를 날아라] 편에서 암흑대장군의 하수인으로 재등장한다)이나 사마라와 밤피라 같은 생소한 부하들의 등장은 헬박사-아수라 남작의 삽질로 무한반복되는 [마징가 제트]의 이야기에 신선함을 불어 넣는다.
한국식으로 리파인(refine)된 작품이니만큼 인물이나 용어들의 변화도 눈에 띄는데, 잘 아시다시피 가부토 코우지는 강쇠돌로, 사야카는 애리로, 보스는 대장으로 각각 이름을 바꿨으며, 초합금 Z의 주 원료인 제페니움이라는 단어대신 코리아늄이라는 용어를, 필살기 브레스트 파이어를 열통으로 표현하는 등 보다 한국적(?)인 이미지로 순화시켰다.
특히 이세호 버전의 [마징가 제트]는 나가이 고나 오타 고사쿠의 마징가 시리즈 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역동적인 그림체를 보여준다. 나가이 고의 그림은 너무 성의없이 그려져서 오히려 으스스한 느낌마저 드는 반면, 오타 고사쿠는 보다 정돈된 느낌의 기체를 보여주는데, 이세호 버전의 마징가는 말 그대로 미끈하게 현대적으로 리모델링된 듯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소년만화에 어울리게 나가이 고 특유의 폭주하는 19금적 성향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 또한 장점이자 큰 특징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 내에서 마징가 관련 만화를 그린 작가가 나가이 고나 오다 코사쿠를 제외하고 5명이 더 있다는 점인데, 이 마이너 작가들의 마징가 시리즈는 원고분실로 인해 더 이상 재판되지 않아 오히려 원작들 보다도 더 희귀하고 값비싼 아이템 취급을 받고있다 하니, 이러한 희귀템 반열에 이세호 버전이 정식으로 대접받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현대 코믹스의 마징가 시리즈 이후 슈퍼로봇 만화의 인기는 서서히 쇠퇴해 갔고, 이후 국내에서 국내 작가의 이름을 딴 해적판 형식으로 발매된 작품은 1988년 동방서관의 킹코믹스 레이블로 발매된 황금철 작가의 [철인왕 타이거 V]로서 문고본으로는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는 나가이 고 판 [마징가 제트] 2권에 실린 '그로고스 G5편'과 '미소녀 로렐라이'의 내용을 엮어 놓았다.
ⓒ 동방서관 All rights reserved.
1990년대 포켓판 해적판이 한창 인기를 끌 무렵에는 팬더 코믹스에서 [천하무적 마징거 Z]라는 제목으로 나가이 고의 [마징가 제트]가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으나 일부 지역에 소량만 풀린 판본인지 아는 이는 드물다.
그러다가 2001년 서울문화사를 통해 마침내 나가이 고의 오리지널 3부작과 [그레이트 마징가] 편이 정식으로 발매되었다. 사실 원조 [마징가 제트] 판본이라는 가치 외에는 재미면이나 구성 면에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다이토샤 와이드판이어서 어딘지 아쉬움을 남기지만 이토록 마징가 제트의 오리지널 작품을 정식으로 받아보게 되기까지 한국에서는 무려 30년 가까이 기다려야 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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