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반게리온: Q - 다시 마니아들의 영역으로 들어가다
- 결정적인 스포일러라고 할만한 건 없습니다만 줄거리 소개 정도는 있습니다-
사골게리온이라고 원성이 자자한 시리즈이긴 해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전작인 [에반게리온: 파]는 지나치게 잘 만든 작품이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가 속편이 보여줄 수 있는 미덕의 극한까지 도달했듯이, [에반게리온: 파]는 기존 TV판의 설정을 뒤엎는 동시에 무수한 떡밥들을 투척했으며, [에반게리온]의 성격을 마니아적인 영역에서 대중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고, 게다가 작화나 음악, 연출의 퀄리티마저 기막힌 걸작이 아니었던가.
그로부터 4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은 3년이겠지만- 우리에게 있어 그 기다림은 가히 고문에 가까운 시간이었음을 새삼 강조하진 않겠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을 감내한 팬들의 상당수에게 [에반게리온: Q]는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불쾌한 경험이다. 이는 흡사 [엔드 오브 에바]의 재림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시간을 되돌려 [에반게리온: 파]로 잠시 돌아가 보자. [에반게리온: 서]의 야시마 작전에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를 떨쳐버린 신지는 [에반게리온: 파]에서 레이를 구출하려는 집념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열혈소년으로 거듭났다. 이를 계기로 신지는 이전 TV판의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로 변신했다. 관객들은 이 새로운 [에반게리온]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발견했고, 아마도 이것이 신 극장판이 추구하려는 이상향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에벤게리온: Q]에서는 그 기대를 가볍게 짓밟는다. 오히려 간신히 트라우마를 극복해 의욕적으로 바뀐 소년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는 점에서는 죄질이 더욱 좋지 않다. –안노 히데아키는 새디스트가 아닐까- 덕분에 신지의 감정선에 매립되어 버린 이번 작품은 그러한 절망과 좌절의 에너지를 관객들에게 온전히 쏟아 붇는다. 관객들은 철저히 신지의 입장에서 이번 작품의 이야기를 따라가야만 하며, 굳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더라도 절로 그렇게 된다. 그리고 그 기분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 Khara/ GAINAX. All Rights Reserved.
이야기의 시작은 전편으로부터 14년이 흐른 시점. [에반게리온: Q]는 그 잃어버린 14년의 시간동안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카오루의 개입으로 중단된 ‘서드 임팩트’는 무슨 영문인지 이미 발생되었고, 인류는 그로 인해 거의 멸절된 듯 하다. 네르프의 조직은 거의 붕괴되어 버린 것 같지만 여전히 수장인 겐도와 후유츠키가 본부를 지키고 있으며 에바 마크 9를 기동하는 레이도 행동을 함께 한다.
한편 네르프 멤버의 대다수는 미사토가 함장으로 있는 기동전함 분더의 크루가 되어 있다. 현재 이들은 네르프의 반대 세력인 뷔레를 결성해 결사적으로 에바에 대항한다. 더군다나 14년만에 동결에서 풀려난 신지를 마주하는 예전 네르프 멤버들의 눈빛은 경멸에 가깝다. 누구보다도 신지를 아끼고 이해했던 미사토는 너무나도 냉정하게 신지를 대한다. 이 모든 행동의 이면에 무슨 갈등과 원인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이번 작품에서는 모조리 생략되어 있다. (그 이유나 추측에 대해서는 보다 심화된 포스팅을 통해 거론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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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보니 기존의 코어 팬들은 물론, 새로운 팬들까지 에바의 세계로 끌어들이며 리빌드에 성공했던 [에반게리온: 파]에 비해 이번 작품은 연결성이 심히 떨어진다. 기존에 던진 떡밥들의 회수는 고사하고 이제는 더 많은 떡밥들을 정신없이 투척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는데다, 짧아진 러닝타임에 밀어붙이듯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일반적인 관객들은 극도의 혼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가장 비난받아야 할 대목은 전작과 완전히 달라진 캐릭터의 행동과 성격의 괴리감이다. 비록 14년간의 내용이 빠져있어서 최종판이 나오기 전까지 이를 섣불리 판단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나, 시리즈에 종속된 개별 작품으로 봤을 때 [에반게리온: Q]는 무책임할만큼 궤도를 벗어나 버린 모양새다.
물론 장점도 있다. CG를 최대한 2D 셀애니메이션에 가깝게 묘사한 작화의 연출과 성우들의 연기력, 게다가 사기스 시로의 스코어는 이번 작품이 갖춘 완벽한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다. 극장안을 가득 매우는 빵빵한 사운드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부럽지않은 액션씬, 특히나 [신비한 나라 나디아]의 팬들이라면 환호성을 지를 법한 기동전함 분더의 출격장면은 [에반게리온: Q]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 Khara/ GAINAX. All Rights Reserved.
이처럼 [에반게리온: Q]는 단점과 장점이 명확한 작품이다. 지나칠 정도로 파격적인 전개, 극도로 불친절한 해설, 불안정한 캐릭터의 묘사와 너무 짧은 러닝타임 등 전작에서는 보지 못한 단점이 두드러진 반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줄 비주얼과 사운드의 향연, 여전히 궁금증을 유발하는 떡밥들의 난무, 그리고 완전히 오리지널로 새롭게 진행되는 이야기 등 마니아적 요소가 더욱 강화된 점은 결국 신극장판의 마지막까지 보게 만드는 의지를 더욱 굳게 만든다. 그래, 잠시 방심했을 뿐이다. [에반게리온]은 역시 [에반게리온]이다.
P.S:
1.일각에서는 3.11 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모든 콘티를 갈아엎어서 이야기의 방향성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는데, 이건 이거 나름대로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봐야 겠다.
2.[신비한 나라 나디아]의 OST를 편곡한 사운드트랙은 정말이지 소름이 돋았다.
3.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건 진리의 아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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