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브 파이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혹은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
얀 마텔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라이프 오브 파이]의 감독은 바로 이안입니다. [헐크], [브로크백 마운틴], [와호장룡], [음식남녀]… 이 영화들의 감독이 모두 한 사람이라는게 믿겨 지십니까? 저는 이렇게나 광범위한 연출의 스펙트럼을 지닌 감독이 헐리우드가 아닌 대만에서 나왔다는게 더 놀랍습니다.
영화는 성인이 된 파이가 한 작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동물원을 운영하는 부모밑에서 성장한 파이는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범신론적인 믿음을 가진 독특한 소년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동물원 부지 사용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결국 동물을 몽땅 배에 싣고 캐나다로 이민을 택한 파이의 가족들은 폭풍우에 휘말려 난파당합니다.
홀로 살아남은 파이는 구명보트 위에서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그리고 뱅갈 호랑이인 리처드 파커와 함께 표류하게 됩니다. 그러나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하이에나에게 죽임을 당하고 리처드 파커가 하이에나를 죽이면서 배 위에는 호랑이와 파이만이 남게 됩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파이는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를 표류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지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관객이라면 아마 이 작품이 단순히 한 소년과 호랑이가 겪는 바다 위 표류기 정도의 조난영화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이가 있는 작품입니다.
ⓒ Fox 2000 Pictures, Haishang Films, Rhythm and Hues. All rights reserved.
영화 초반에 파이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 건 파이의 표류기가 의미하는 것이 단순히 보이는 것 이상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파이는 한 성당에서 신부에게 ‘목마른 아이 You must be thirsty’라고 불리게 되는데, 눈치빠른 관객은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본래 이름이 ‘Thirsty 갈증’이었다는 점과 묘한 대칭점을 이룬다는 걸 알아차렸을 겁니다.
파이가 구조당한 뒤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어했던 선박회사 직원들에게 들려주는 두 가지의 다른 결말은 실제 파이가 경험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중의적인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는 셈이지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의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면서 종교적인 메시지와 더불어 믿음과 이성의 경계를 구분짓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이야기로 관객들의 넋을 빼놓습니다.
워낙 원작의 스토리가 좋은 것도 있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는 CG와 3D를 단순한 볼거리로서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의 일부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더욱 놀랍습니다. 마지막 리처드 파커가 정글로 사라질 즈음 3D에서 2D로 화면이 전환되는 부분은 이 영화가 온전히 3D를 필수적인 장치로 사용했음을 알려주고 있지요. 돈벌이를 위해 3D를 갖다붙인 영화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로서 이안 감독은 또 한번 자신의 탄탄한 기본기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제 어떤 영화를 맡겨놔도 기본이상은 할 것이라는 신뢰감이 한층 더 두터워졌네요.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P.S:
1. 제라드 드 빠르디유의 단역출연에 의아해 하는 분들이 계시던데 이는 분명히 감독이 의도한 것일 겁니다. 평소 그의 배역과 어울리지 않는 더티한 역할로 잠깐이지만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줌으로 인해 또다른 결말에 대해 머릿속으로도 자연스러운 상상이 이루어지니까요.
2. 2D는 아직 보지 않았습니다만 리처드 파커가 정글로 사라지는 장면이 칼라에서 흑백으로 전환된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3. 영화가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느낌도 들긴 합니다. 아마 리들리 스콧처럼 조금만 더 불친절하게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작품은 걸작의 반열에 단번에 올라갔을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이 상태로도 충분히 수작입니다만.
4. 내용의 특성상 인도풍의 느낌이 강한데, M. 나이트 샤말란이 이 작품을 연출했으면 엔딩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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