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 스파이더맨 2 - 현실에 짓눌린 히어로의 초상 (2부)
속편열전(續篇列傳) No.25
아마 DVD Prime에 연재되었던 제임스 카메론 연대기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카메론 감독의 성깔은 헐리우드에서도 유명하지요. 사실 [터미네이터 2]를 끝낸 제임스 카메론은 [스파이더맨]의 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때 엄청나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무려 80페이지에 달하는 초기 스크립트를 직접 작성하며 의욕을 불태웠는데요, 샘 레이미 버전의 [스파이더맨] 중 일부 컨셉은 바로 제임스 카메론의 스크립트에 담긴 것입니다. 1
한편 매너햄 골란과 캐롤코와의 계약 시점에 골란은 중요한 한가지 단서를 달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의 크래딧에 자신의 이름을 제작자로 넣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캐롤코와 [스파이더맨]의 각본 및 감독으로 계약을 맺은 카메론은 [스파이더맨]의 크래딧 표기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메론은 자신의 영화에 ‘매너햄 골란 같은 무책임한 제작자의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주장했고, 2 이에 발끈한 골란은 캐롤코와의 [스파이더맨] 판권계약이 무효라는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스파이더맨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한 때 제임스 카메론 작품의 단골배우였던 마이클 빈을 주연으로 내세운 [스파이더맨] 페이크 포스터.
캐롤코 측은 즉각 대응에 나섰고, 역으로 [스파이더맨]의 TV-비디오 판권을 매너햄 골란으로 부터사들인 비아콤과 소니마저 고소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됩니다. 비아콤과 소니는 캐롤코와 골란이 사장으로 있던 21세기 필름, 그리고 마블에게까지 싸그리 고소크리를 먹이게 되는데, 여기에 (캐논 픽처스를 인수한) 파테 커뮤니케이션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MGM이 끼어들어 판권 주장을 하면서 ‘스파이더맨 전쟁’은 ‘스파이더맨 대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3 이 과정에서 제임스 카메론은 [스파이더맨]에서 손을 떼게 되지요.
1997년 위자드 매거진에 실린 [스파이더맨]의 페이크 포스터. 당시 [타이타닉]으로 주가를 올리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결국 이 ‘스파이더맨 전쟁’은 캐롤코와, 21세기 필름, 마블측이 모두 부도사태를 맞이하면서 남아있는 MGM과 소니측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1999년 LA 대법원은 MGM의 판권 기한이 만료되었다고 판결했고, 더 이상의 소송으로 불필요한 소모전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MGM은 소니측과의 장외 협상에 나서게 됩니다. MGM은 007 영화의 모든 권리를 독점하는 한편, 소니의 자회사인 콜럼비아 픽쳐스가 소유중인 [카지노 로얄]의 판권을 가져가는 대신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양보하기로 합의한 것이지요.
이러한 빅딜의 성사로 인해 가장 큰 수혜를 본 곳은 다름아닌 마블이었습니다. 파산직전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마블의 CEO 아비 아라드는 즉각 소니측과 [스파이더맨]의 판권 계약을 체결해 구사일생으로 마블을 정상화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참으로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떠난 [스파이더맨]의 빈자리를 메울 감독으로는 얀 드봉, 이안, 데이빗 핀처 등이 고려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다크맨]을 통해 새로운 히어로물의 가능성을 보여준 샘 레이미에게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스파이더맨]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주로 B급 영역에서 활동했던 샘 레이미에게 맡긴다는건 누구도 예상치 못했지만 제작사인 콜럼비아 사무실로 찾아가 1시간 반동안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샘 레이미는 결국 감독직을 거머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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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끝에 대중에게 공개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은 2002년 극장가의 최대 화제작으로 떠올랐습니다. 개봉 이틀만에 4천 3백만 달러의 수입을 벌어 들여 1일 흥행 수입이 가장 많은 영화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3일째 되는날에는 북미 흥행 1억 달러를 단숨에 돌파할 정도였지요. 주연인 토비 맥과이어는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전 세계는 화면 가득 웹스윙을 펼치는 스파이더맨의 활강장면과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열광했으며, [엑스맨]에 이어 찾아온 슈퍼히어로물의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혹자는 [스파이더맨 2]가 8억2천만달러라는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한 [스파이더맨]의 성공 이후에 기획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샘 레이미가 2편의 감독을 맡기로 계약한 것은 2002년 4월 1일로 [스파이더맨]이 개봉하기 한 달 전에 성사된 일입니다. 이미 소니측에서는 [스파이더맨]이 전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할 것이라는 걸 예견했던 겁니다.
실제로 [스파이더맨]에서 샘 레이미는 속편을 위한 다양한 복선들을 깔아 놓았습니다. 이를테면 코너스 박사 (리저드), 에디 브록 (베놈), 해리 오스본 (그린 고블린 주니어), 멘델 스트롬 (로봇 마스터) 같은 인물들은 속편에서 언제든지 메인 빌런으로 성장할 수 있는 캐릭터였지요. 또한 초기 각본 작업에서는 [스파이더맨]에 두 명의 악당을 출연시킬 예정이었는데, 바로 그린 고블린과 닥터 옥토퍼스 였습니다. 하지만 속편의 악당을 남겨놓기 위해 최종적으로는 닥터 옥토퍼스가 빠지게 되었고 [스파이더맨 2]에서 메인 빌런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1편으로부터 2년만에 돌아온 [스파이더맨 2]는 몇가지 불안 요소들을 안고 있었습니다. 일례로 영화 속에서 스파이더맨이 지붕에서 차 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보면 ‘아이고 내 등!’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이 각본이 완성되고 얼마 후에 만성 허리통증을 호소한 맥과이어가 프로젝트에 합류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통보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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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토비 맥과이어는 출연료 협상을 위해 모종의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소니측이 ‘그러면 집에서 쉬시던가’라고 쿨하게 답변을 보내고 대타로 제이크 질란할을 진지하게 고려하면서 주연배우의 교체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결국 이 일은 토비 여친의 아버지인 유니버셜 회장 론 메이어의 중제를 통해 가까스로 토비에게 다시 스파이더맨을 맡기면서 일단락되었지요.
또한 [다크맨]때부터 샘 레이미와 함께 해 온 대니 엘프만은 촬영기간 동안 감독과 종종 마찰을 겪었습니다. 그는 훗날 ‘감독이 변했다, 그와는 다시 함께 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스파이더맨 3]에서는 대니 엘프만 대신 크리스토퍼 영이 참여하게 됩니다.
각본의 미완성 역시 불안요소였습니다. [스파이더맨 2]의 각본가는 전편의 데이빗 코엡이 아니라 [언페이스풀]의 앨빈 사전트로 바뀌었는데 공식적인 대본이 완성되기 전에 [스파이더맨 2]의 촬영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영화의 완성도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만한 부면이었지요.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스파이더맨 2]는 전편을 뛰어넘은 놀라운 작품으로서 영화사의 주목할만한 속편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할 만큼 높은 완성도를 자랑했습니다. 우선 전편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던 액션의 절대량이 증가했고, CG는 더 견고해졌으며, 고뇌하는 영웅의 캐릭터 속에 일반인의 삶을 갈망하는 피터 파커의 모습과 스파이더맨의 자아확립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구성된데다 진지함 속에서도 시종일관 샘 레이미 특유의 키치적인 느낌을 섞어 넣어 균형잡힌 연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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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스파이더맨 2]의 제목으로는 [스파이더 맨: 노 모어]와 [스파이더 맨: 언마스크드]가 고려된 바 있습니다. 이는 곧 고뇌하는 소년이 비로서 한 남자로, 그리고 영웅으로 성장하는 슈퍼히어로의 존재론적 의문에 접근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실제로도 [스파이더맨 2]는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이나 팀 버튼의 [배트맨] 이래,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에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한 히어로물이었습니다.
[스파이더맨 2]의 인트로인 피자배달씬은 주인공 피터 파커의 현실과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의 삶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크고 감당하기 벅찬 것인지를 경쾌하면서도 인상깊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초라한 영웅의 뒷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피터 파커라는 소시민의 삶에 더욱 공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위태로운 연애와 생활고, 보통의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속에 세상을 구해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실제 모습은 1편보다 훨씬 더 현실감을 띄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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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편으로는 초대형 상업영화가 주는 압박감, 그리고 거대 제작사의 입김과 원작이 지닌 아우라의 굴레를 온전히 탈피하지 못한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낸 샘 레이미식 [스파이더맨]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도 있었겠지만 [스파이더맨 2]는 3부작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재미있고, 기발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3]까지 감독직을 연임하면서 슈퍼 히어로물 3부작을 모두 연출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지만 워낙 뛰어났던 2편의 영향 때문인지, 플롯의 불균형으로 산만한 흐름을 지닌 [스파이더맨 3]는 2편만큼의 평가에 못미치며 결국 불완전한 3부작의 형태로 여정을 마무리하게 되었지요. 이제 새로 리부트를 선언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성공여부는 아마도 [스파이더맨 2]의 아성을 뛰어넘을 속편을 만들 것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샘 레이미가 실패(?)한 완벽한 3부작을 완성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을 겁니다.
*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단, 본문의 내용은 작성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제임스 카메론 버전의 [스파이더맨] 중 살아남은 설정은 피터 파커의 손목에서 생성되는 거미줄이라는 것과 방사능 거미가 아닌 유전자 변형 거미에 의해 스파이더맨이 탄생한다는 정도다. [본문으로]
-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매너햄 골란이 제작한 또하나의 히어로물 [캡틴 아메리카]의 참혹한 완성도가 한 몫 했을 것이다. [본문으로]
- 다소 복잡한 상황이기에 다시 정리하자면 [스파이더맨]의 판권을 가지고 있던 캐논 픽처스의 매너햄 골란은 영화 판권을 제외한 비디오-TV판권을 비아콤과 소니측에 팔아 치운다. 그리고 캐논의 부도 후 캐논을 파테에게 넘긴 골란은 파테에서 인수한 21세기 필름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이 시점에서 [스파이더맨]의 ‘영화화 판권’을 가진 사람은 21세기 필름의 매너햄 골란이었다. 그가 [스파이더맨] 영화 판권을 캐롤코에 팔 당시만 해도 판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