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호넷 - 밉상도 영웅이 되는 시대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헐리우드는 수많은 슈퍼히어로물을 쏟아냈습니다. 그 중에서는 [스파이더맨 2]나 [다크 나이트] 같이 독보적인 완성도를 보인 작품도 있었고, [아이언맨]이나 [헬보이]처럼 그래도 평작 이상의 성과를 보여준 작품도 있었으며, 반면 [고스트 라이더]나 [데어 데블]같이 무척이나 실망스런 작품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21세기 히어로물의 성향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코믹스 원작의 성격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에 가져오려는 시도와 또 하나는 히어로의 아이덴티티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요.
그 중에서도 성공적인 히어로물의 성향은 대개 후자쪽으로 기웁니다. 21세기의 히어로는 어딘지 어둡고 고뇌하는 인물들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만 이것도 이제는 조금 진부한 흐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달라진 히어로물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히어로의 빌런화'입니다. 영웅이면서도 악당인, 혹은 악당이지만 영웅이 되는 설정은 [왓치맨]과 [슈퍼 배드], [메가 마인드] 그리고 [킥 애스] 등의 작품들을 거치며 현 슈퍼히어로 장르의 가장 큰 흐름을 형성해 왔습니다. 좀 비약하자면 찌질한 슈퍼히어로가 대세랄까요.
이제 소개할 2011년의 포문을 여는 블록버스터 [그린 호넷]은 꽤나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먼저 이소룡의 가능성을 알린 1966년 TV 시리즈물을 기억하는 올드팬에게는 팬심을 자극하는 색다른 리메이크로서, 또한 미셸 공드리 감독의 팬들에게는 감독의 첫 번째 블록버스터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슈퍼히어로 매니아에게는 2011년의 첫 번째 실사 히어로물로서의 기대감이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Columbia Pictures. All Right Reserved.
사실 [그린 호넷]은 제작 초기에서부터 잡음이 많았습니다. 특히 주성치의 헐리우드 진출을 놓고 기대반 우려반이 혼재된 가운데 결국 도중 하차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는가 하면 니콜라스 케이지도 출연을 포기했고, 국내 언론에서는 관심의 대상이 된 케이토 역의 배우를 놓고 권상우가 유력한 후보라는 자화자찬식의 찌라시 기사를 쏟아내기도 했었죠.
아시겠지만 [그린 호넷]의 리메이크는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닙니다. '배트맨'처럼 팬층이 광범위한 히어로도 아닌데다, 그나마 가장 잘 알려진 1966년의 TV 시리즈도 기실 인기와는 거리가 먼, 그래서 1시즌만에 종영되고 만 그런 작품이었거든요. 시차상으로도 거의 반세기 가까이나 뒤쳐져 있는 구시대의 유물인 셈이지요. 그럼에도 [그린 호넷]이 지닌 상업적 가치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짧은 인생을 마감한 이소룡의 존재감일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다시 언급하기로 하지요.)
미셸 공드리 감독은 [그린 호넷]의 기준이라 할 수 있는 TV 시리즈물에서 당시 60년대 히어로물의 트렌드였던 캠피 스타일을 끌어 들이기로 결심한 듯 합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배트맨]과는 달리 [그린 호넷]은 나름 진지한 축에 속하는 히어로물이었습니다. 물론 연출기법이나 상황설정은 촌스럽지만 대놓고 코미디였던 [배트맨]과는 염연히 다른 성질의 작품이었지요. 여튼 감독 나름대로 원작을 재해석한 측면도 없지는 않은데, 영화는 영웅의 탄생과정에 진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그저 재미를 위해 영웅놀이를 시작한 철부지 청년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갑니다. 악당인척 하는 슈퍼히어로의 설정 자체는 썩 나쁘지 않아보이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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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다에요. [그린 호넷]은 막나가는 액션 코미디입니다. 말하자면 작년 여름 개봉된 [A-특공대]나 [나잇 앤 데이]같이 아무 생각없이 시간 떼우기에는 최적인 그런 영화라는 말이죠. 스토리는 어디갔는지 찾아보기 힘들고 말장난과 저급유머, 뻥뻥 터지는 액션만이 한가득 존재하는 팝콘무비 말입니다. 성장영화로서의 가능성이나 파더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2세의 트라우마 극복 같은 좋은 요소들은 모조리 날려버렸습니다.
[그린 호넷]은 각 캐릭터를 맡은 배우들의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브랫은 그냥 봐도 찌질해보이는 세스 로건이 맞춤연기를 선사하고 있고 (잭 블랙을 갖다놔도 어울리겠더군요), 케이토 역의 주걸륜은 평상시 알려진 엄친아 이미지를 100% 활용합니다. 노래와 피아노 연주씬 그리고 극 중에서의 대사처럼 마치 '스위스 아미 나이프'와 같은 캐릭터로 등장하지요.
카메론 디아즈는 도대체 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두 주인공이 가진 네임 벨류를 보완하기 위해 투입된 것 같은데, 그녀의 백치미를 살리려는 것 까진 좋지만 글쎄요.. 자글자글 눈가에 주름이 잡힌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어떻게 해서든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오히려 안쓰러워 보입니다. 물론 이들 배우들의 캐릭터 싱크로는 훌륭한 편이에요.
가장 큰 낭비는 크리스토프 왈츠입니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신선한 악마적 캐릭터를 소화해낸 그가 이렇게 존재감없는 악당으로 등장하다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온갖 나쁜짓을 일삼으면서 얼토당토 않은 농담 한두마디 던진다고 매력적인 악당이 되는건 아닌데 말이죠. 오히려 깜짝 출연한 제임스 프랑코의 연기가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면 할말 다 한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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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관심을 두었던 부분은 과연 [그린 호넷]의 상징적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소룡을 어떤 방법으로 오마주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찾아보니 약 세가지 정도의 오마주가 등장하더군요. 첫 번째는 극 중 주걸륜의 스케치북에서 이소룡의 그림이 나온다는 점, 두 번째는 원인치 펀치, 세 번째는 쌍절곤입니다. 이러한 요소들의 사용도 나름 괜찮습니다만 차라리 [인크레더블 헐크]처럼 영화속 TV화면으로나마 이소룡의 실제 얼굴을 한번쯤 비춰주었어도 좋을뻔 했어요.
물론 영화는 충분히 웃기고 활기찹니다. 상영시간 118분간 빼곡히 들어찬 사건, 사고의 연속으로 인해 관객들은 별로 지루해할 틈이 없죠. 그럼에도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합니다. 이유가 뭔가 생각해봤더니 이 작품은 영화의 쾌활함에 비해 지나치게 잔인한 경향을 보입니다. 인명경시는 기본이고, 사람이 엄청나게, 자주 '깔려' 죽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압사장면을 좋아하는 건지 GV시간이 있으면 감독에게 물어보고 싶더군요.
무엇보다 미셸 공드리의 팬들에게 [그린 호넷]은 어떠한 의미도 주지 못할 작품입니다. 그의 필모그래피중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이터널 션사인] 이후 서서히 불안한 행보를 보이던 그에게 있어 각본가 찰리 카우프만의 부재는 거의 치명적이라 할만큼 이번 작품에서 큰 공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사실상 [그린 호넷]이 실패한다면 이후 헐리우드에서 그의 입지는 대단히 약해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그렇게 재능있어보이던 감독이 헐리우드의 상업 시스템에서 퇴색되어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군요.
P.S:
1.누가 번역했는지 (심증은 갑니다만) 심히 맘에 안드는 번역입니다. '사이드킥'을 조수라고 했다가, 곁다리라고 했다가, 쫄다구라고 했다가.. 참 버라이어티하게 바꾸더군요. 사이드킥은 그냥 사이드킥일 뿐입니다. 영화보면서 그 정도 이해못할 관객들은 이제 별로 없어요. 적어도 한 단어로 통일이나 시키던지..
2.크리스토프 왈츠의 유머 중에서 진짜 배꼽빼는 장면이 있었어요. '습기가 차서 흐릿하네'. 뭔소린지 이해 못하시겠지만 영화를 보시면 아마 크게 빵 터질겁니다.
3.제임스 프랑코 외에도 깜짝 놀랄 만한 까메오가 등장합니다. 까메오인지 그냥 돈이 궁해서 단역출연한건지는 몰라도 [터미네이터 2]의 에드워드 펄롱이 잠깐 나옵니다. 얼마나 망가졌는지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길..
4.신문사의 편집장으로 나오는 배우는 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입니다. 누군지 잘 모르시는 분이 많겠지만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해리슨 포드에게 유니콘을 접어서 주는 바로 그 형사입니다. 연기파 배우로 알려졌는데, 꽤 오랜만에 화면에서 보는군요.
5.원점으로 돌아가 이 영화가 애초부터 이런 캠피적 슈퍼히어로물로 갈 예정이었다면 주성치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봐요. 어차피 그의 초기작에서 볼 수 있는 주성치의 액션연기는 의외로 쓸 만할뿐더러 유치뽕짝 코미디의 대가하면 또 주성치 아니겠습니까.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지만 말이죠.
6.3D의 존재가치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또 하나의 입체영화입니다. 그냥 2D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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