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 - 시리즈의 전복과 재결합,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가끔 보면 극장가에 생각지도 못한 작품이 기습적으로 개봉되곤 합니다. 매니아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어 버린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특히 더 그러한데, 주로 몇몇 영화제에서만 소규모로 한정 개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식으로 개봉되는 작품들 중에서 '어? 이걸 개봉한단 말이야?'라는 식의 의외의 기쁨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작년 겨울에 개봉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도 그런 깜짝 개봉의 기쁨을 주었던 작품중의 하나입니다. 사실 이 작품은 타니가와 나가루가 쓴 원작 라이트 노블이 원작입니다만 메인 캐릭터 자체가 '엽기적인 그녀' 같은 컨셉인데다 내용마저 안드로메다로 간 듯한 황당함이 주를 이루는 덕후력 만점의 작품으로서 이게 일반적인 관객수요를 가졌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데요, 그럼에도 나름 TV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을 재밌게 본 저로서는 아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던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전 덕후가 아니라구요 ㅠㅠ)
우선 이 작품에 대해 문외한인 분들을 위해 전체적인 개론-라이트 노블, 애니메이션, 코믹스 모두 포함-을 말씀드리자면, 얼굴은 A급인데 성격은 지랄같...아니, (죄송합니다) 성격은 괴팍한 스즈미야 하루히와 평범한 고등학생인 쿈이 같은 반이 된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의 내용은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네요)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만점인 하루히는 워낙에 그 독특한 성격 때문에 반에서 혼자 놀다시피하는데, 그냥 말한번 붙였다가 하루히한테 엮인 쿈은 그녀의 온갖 장난질에 놀아나는 불쌍한 희생양이 되고 맙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루히의 변덕질의 결과물인 방과후 서클 'SOS단'인데, 여기에 수수께끼의 문예부원 나가토 유키, 그리고 상급생이지만 모에력 충만한 아사히나 미쿠루 선배, 그리고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루히에게 끌려온 고이즈미 등 총 5명이 부원으로 합류하면서 이 집단은 거대한 사건(?)들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 Kadokawa Pictures/Kadokawa Shoten Publishing Co./The Klock Worx Company, All Right Reserved.
그런데 어느날 쿈은 나가토가 우주의 다른 지성체인 '정보통합사념체'가 파견한 일종의 프로그램과 같은 존재이며, 코이즈미는 초능력자, 그리고 아사히나 선배는 미래에서 온 소녀라는 황당무계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하루히는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우주의 질서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전능자 비스무리한 존재였던 겁니다. 만약 하루히가 일상에 따분함을 느낀 나머지 그 짜증을 본격적으로 표출하게 된다면 지구 하나쯤 뒤엎는건 일도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그녀에게 평온함을 찾아주는건 평범한 소년 쿈의 절대적인 의무이자 숙명이 되어 버립니다. 물론 나머지 세 명도 하루히가 스스로의 정체를 자각하지 못하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막는거구요.
이렇게 글로 써놓고 보니 원래보다 더 당황스런 플롯처럼 보이긴합니다만 실제 작품 자체는 이러한 현실과의 괴리감을 거의 느낄 수 없을만큼 빈틈없이 촘촘한 얼개로 짜여져 있습니다. 사실 컨셉이 굉장히 독특하면서도 막나가는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스즈미야 하루히' 시리즈가 일종의 변형된 할렘물이라고 생각됩니다. 분명 이 작품에는 노골적인 로맨스나 애정 요소가 두드러지지는 않음에도 초절정의 매력녀가 셋 씩이나 등장하고, 알게 모르게 이들과 쿈과의 관계는 뭔가 얄딱구리한 상상력을 부추기거든요. 어쨌거나 그만큼 등장인물들의 매력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월등한 편입니다.
자, 이제 어느정도 작품의 기본정보를 말했으니 본격적으로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로 들어가 봅시다. 극장판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원작의 우울, 무료, 폭주, 동요, 한숨, 동요, 분개, 분열 같은 여러 시리즈 중에서 중에서 4권인 '소실편'에 해당됩니다.
ⓒ Kadokawa Pictures/Kadokawa Shoten Publishing Co./The Klock Worx Company, All Right Reserved.
이야기는 송곳으로 콕 찍으면 지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이 추운 겨울을 배경으로 시작됩니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앞둔 SOS단의 괴짜들은 파티를 어떻게 즐길것인가 하는 하루히의 엉뚱한 계획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요. 그런데 쿈은 이제 슬슬 지쳐갑니다. 외계인도 아니고, 초능력자도 아니고, 미래에서 온것도 아닌 평범한 자신이 왜 이런 골치아픈 문제에 휘말려 하루히와 지지고 볶는 사이가 되었는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 도착한 쿈은 반의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유독 많아진 감기환자, 그리고 결석한 하루히... 평상시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지만 그래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려던 찰나, 갑자기 작품은 미스테리 스릴러로 변모하게 됩니다. 바로 있어서는 안될 인물인 '그녀'가 쿈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지요. (이 부분은 TV판을 안본 분들을 위해 남겨놓겠습니다만 '그녀'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슬로우 모션은 마치 호러영화를 방불케하는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 Kadokawa Pictures/Kadokawa Shoten Publishing Co./The Klock Worx Company, All Right Reserved.
더 큰 문제는 반 아이들 중 누구도 하루히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다급히 SOS단 부실로 찾아가 봤지만 홀로 남아있던 나가토마저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사히나 선배도 자신이나 하루히를 기억 못하고, 더군다나 고이즈미가 속해있던 반은 통째로 사라져 버렸으니 이제서야 쿈은 깨닫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번 [스즈미야 하루히의 소실]은 대단히 긴박한 상황에 놓인 쿈이 원래대로의 세상을 되찾기 위해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위트있으면서도 스릴넘치는 미스테리 구조로 전개해 나갑니다. 과연 쿈이 와 있는 세계는 패러랠 월드인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시간을 조작해 현재를 바꾸어 놓은 것인지, 도대체 이 모든 사건을 일으킨 진범은 누구인지 등 대단히 흥미진진한 이야기 거리가 준비되어 있지요. 러닝타임이 무려 2시간 40분에 육박하지만 스즈미야 하루히의 팬이라면 정말 지루하지 않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임을 보증합니다.
팬들을 위한 몇가지 감상 포인트를 열거하자면 먼저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로 모에화 된 나가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인데, 원작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이 무뚝뚝한 아가씨의 매력은 이번 작품에서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올라서면서 최고조에 이릅니다. (아마 말은 안해서 그렇지 원작 여주인공 3인방 중에서 인기투표를 한다면 나가토가 단연 압도적으로 1위일겁니다)
ⓒ Kadokawa Pictures/Kadokawa Shoten Publishing Co./The Klock Worx Company, All Right Reserved.
또한 다른 교복을 입은 하루히의 신선한 모습도 일품입니다. 특히 TV판의 첫 대면에서 긴 생머리를 휘달리며 여신급 포스를 풍기던 그때의 그 장면을 오마주하는 시퀀스는 센스가 만점이랄까요. 영화 [백 투 더 퓨쳐]를 보듯 시공간의 이동을 보는 퍼즐식 구성의 묘미도 상당합니다. 뭐 늘 그랬듯 궁시렁대는 쿈의 독백도 여전하고 말이죠.
반면 원작에 대한 이해나 부족하거나 적어도 TV판의 1시즌만이라도 감상하지 않은 상태라면 이러한 긴 러닝타임과 다소 복잡한 플롯, 그리고 전작에 대한 오마주는 아무 의미없는 지루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단점이 있다는 점도 미리 밝힙니다.
원래 TV 애니메이션의 작화 퀄리티도 훌륭했지만 이번 극장판의 퀄리티는 정말 대단합니다.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CG의 사용과 실제 인물들이 2D화된 듯한 정교한 모션의 사실적인 연출은 어떤 극장판에 비추어도봐도 손색이 없을만큼 완벽에 가깝습니다. 극장판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늦긴 했습니다만 (그래서 극장에서 간판을 내린지도 한참 지났지만) 이 리뷰를 지금 올리는 이유는 본 작품을 감상하기에 최고로 적합한 계절이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에 걸맞는 애니메이션으로 한동안 이 작품을 기억하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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