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일렛 - 눈물나도록 포근하다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영화를 보면 하나같이 포근함이 느껴집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감싸듯 따뜻한 그런 감성에 가깝죠. 때론 엉뚱하지만 잔잔하게 퍼지는 유머와 위트도 탁월합니다. 아직 네 편의 영화 밖엔 없지만 그녀의 작품에는 뚜렷한 지향점이 있습니다. 물론 잔잔함이 특징인 일본 영화 특유의 정서에서 기인하는 점도 부인할 순 없겠죠. 하지만 뭐랄까요. 그녀의 영화에서는 뭔가 빡빡한 삶에서의 여유랄까,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렇기에 일부에서는 그녀의 작품을 가리켜 통칭 '슬로우 라이프 무비'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확실히 [토일렛]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변함없는 스타일과 조화를 이루는 작품입니다. 차분하면서도 조용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관객을 감싸안는 그런 영화에요. 기존의 작품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토일렛]은 100% 영어대사로 이루어진 영화이며, 등장인물도 그녀의 페르소나가 되어 버린 모타이 마사코를 제외하면 전부 외국계 배우들이 열연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인지 영화를 처음 대한 순간에는 이안 감독의 [쿵후 선생]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서양인 손자녀들과 동양인 할머니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그런 관습적인 가족영화를 만들었나보다 싶었죠.
솔직히 [토일렛]은 표면적으로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일본인 할머니와 그녀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손자녀들의 긴장된 일상에 포커스를 두고 있긴 해요. 하지만 관습적으로 내러티브를 구축해나가지는 않습니다. 그러기에는 오기가미 감독이 너무나도 영화를 사랑스럽게 포장해 놓았거든요. 비록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소 비딱하고 어딘지 비정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이들은 모두 선한 밑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할머니와 아이들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건 그들 사이를 중재해 주었을 거라 추측되는 어머니의 공백과 언어 장벽 뿐이에요. 따라서 긴장을 푸는 방법도 그리 거창한 것을 요구하지 않죠. 한마디로 위기와 절정 부분이 빠져있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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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늘 그렇듯 잔잔하게 흘러갑니다. 어머니를 잃은 세 아이들. 장남인 모리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지만 공황장해로 인해 집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폐인 신세, 차남인 레이는 실험실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애인은커녕 친한 친구도 없고 프라모델 수집에 열을 올리는 오타쿠적인 인물, 막내딸인 리사는 까칠하면서도 반항적인 아이. 영화는 주로 둘째인 레이의 시선에서 접근합니다. 그나마 정상적인 범주에서 살아가는 레이는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혼자 따로 나와 살고 있죠. 그런데 세들어 살던 아파트에 화재가 나면서 어쩔 수 없이 레이는 본가로 들어와 살게 됩니다.
어머니를 사별한 식구들은 작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리사는 골칫거리인 모리를 병원에 집어넣고 어머니의 집을 팔아 자신은 기숙사로 들어가고 싶어하죠. 모리는 어머니의 추억이 담긴 집을 팔 수 없다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고, 레이는 사실상 이 문제를 방관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가족의 해체를 직면한 현실 속에서 아주 유별난 상황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건 바로 어머니가 모셔왔던 할머니의 존재입니다. 자신들과는 피 한방울도 안 섞여 있을 것 같은 일본인 할머니. 말도 통하지 않고, 더군다나 집을 떠나 있어서 할머니와의 교류가 전혀 없었던 레이에게는 할머니의 존재가 꽤나 신경쓰이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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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나 리사도 상황은 크게 다를바 없어요. 물론 레이만큼 할머니를 낯설어 하진 않지만 어디까지나 돌아가신 어머니의 어머니라는 정도로만 여겼을 뿐 실제적인 가족으로서 정서를 교류했던건 아니기 때문이죠. 영화는 이제 할머니를 중심으로 세 남매가 어떻게 진정한 가족으로서 융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게 참 독특해요.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어떤 사건이나 대형 이벤트를 통해서가 아니라 작은 소품을 통해 이를 완성해가거든요.
만두와 재봉틀, 에어 기타, 그리고 양변기 등 사소하면서도 유니크한 아이템을 통해 이들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기발하면서도 정말 눈물이 나도록 포근합니다. 특히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택한 만두는 그 자체로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듯 한데요, 마치 여러 가지 잡다한 재료가 서로 뭉쳐져서 만두소가 되고 그것이 만두피로 쌓여 비로서 하나의 완전한 만두가 되듯, 가족도 결국에는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을 생각하게 하죠.
하지만 정말 아쉽게도 영화의 전체적인 울림은 [카모메 식당]만큼 크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토일렛]은 평소 오기가미 감독의 작품보다 유머의 분량이 두 배는 늘어난 것 같고,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만듦새는 좀 더 기성품에 가깝게 완성되어 있어요. 영화 자체로는 흠잡을데 없이 훌륭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작과의 비교는 불가피하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너무 일찍 걸작을 내놓은 감독의 숙명이겠지요. 뭐 개인적으로는 신선함이 너무 지나쳐서 날것의 느낌마저 났었던 [안경]에 비해 훨씬 잘 다듬어진 영화라 좋았습니다만.
P.S:
1.이 영화에도 역시 [카모메 식당]에서 예술에 가까운 음식을 선보였던 푸드 스타일리스트 이이지마 나미가 참여했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만두가 급땡기더군요. ㅜㅜ 감독은 음식을 통한 교류를 굉장히 소중히 생각하는 듯 한데, 관객과의 GV 시간에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상을 물었을 때 저녁식사를 함께 할 수 있는 가족이라고 답한 만큼 차기작에서도 음식을 소품으로 사용하는건 여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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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토일렛]의 배경은 캐나다 토론토입니다. 한 6개월 정도 살았었는데, 오랜만에 보니 참 정겹더군요.
3.영화의 크래딧을 끝까지 보고 나오세요. Special Thanks의 대상이 누구인지 확인하면 아마 폭소가 터져나올 겁니다. 영화의 제목이 아무래도 [토일렛]이니 말이죠.
4.할머니와 세명의 손자녀가 중심인물입니다만 레이의 직장 동료가 아주 대박 웃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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