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 법정은 진실을 가리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무고한 의심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죄를 졌다면 벌을 받는 것이 순리이지만 하지도 않은 일에 책임을 져야하는 것만큼 미치고 환장할 일도 드물다. 불법을 저질러 놓고도 사법 체계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재주를 부리다가 어쩌다 잘못이 드러난들 여전히 고개를 빳빳히 들며 여봐란 듯 노블리스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지천에 널렸는데, 하지도 않은 일에 누명을 쓰면서 죄를 추궁당한다면 그 속은 얼마나 타들어 갈까.
사법부의 판단력과 공정성, 그리고 양형기준에 대한 뭇 백성들의 신뢰도가 아무리 바닥에 떨어졌다지만 막상 닥치고 보면 그래도 법정에서 모든 진실이 가려지리라 믿는게 우리 힘없는 약자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과연 현실은 어떨까?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쉘 위 댄스]나 [으랏차차 스모부] 같은 코믹 히트작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정작 작품 활동에 있어서는 상당히 뜸한 행보를 보여온 수오 마사유키 감독이 10년만에 발표한 신작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장기인 코미디를 벗어나 진지한 노선을 택했다. 그것도 사회성 짙은 법정 드라마로 말이다.
ⓒ Fuji Television Network/Toho Company/Altamira Pictures Inc. All rights reserved.
검찰측과 변호인측이 치열한 진실공방을 벌이다 막판 뒤집기로 반전을 꾀하는 헐리우드식 법정영화의 틀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있어서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대단히 생소한 느낌의 영화다. 이미 제목에서 풍기는 뉘앙스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에서 판결의 내용은 이미 나와있는 것과 다름 없다. 영화의 목적은 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99.9%의 유죄추정을 전제해놓고 진실을 유추하겠다는 사법제도의 불합리한 관행을 폭로하는 것이다.
주인공 텟페이(카세 료 분)는 중요한 면접시험이 있는 당일 지하철에서 치한으로 몰려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정황상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이긴 하지만 그는 무죄를 주장한다. 그런데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 가장 먼저 자신을 보러온 국선 변호인은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만내면 아무일 없이 조용히 끝날 것이라고 넌지시 충고한다. 자신은 무고한데 어떻게 유죄를 인정하라는 것인가. 고지식한 텟페이는 이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길고도 고독한 싸움을 해야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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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 기나긴 1심공판의 진행과정을 2시간 30분에 걸쳐 매우 객관적인 측면에서 여타의 감정적 동요를 배제한채 차분히 전개해 간다. 지루하지 않느냐고? 천만에. 나는 이 작품처럼 몰입도 높은 법정영화를 보지 못했다. 영화는 기존의 법정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리얼리티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유치장 내 수감자들의 생활부터 법정에 들어선 인물들의 대사와 사소한 동장 하나하나까지 완벽히 짜여진 캔버스 위에 배치시킨 수오 마사유키의 역량에 연신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무엇보다 절대권력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약자의 모습을 진지하게 연기해낸 카세 료의 연기가 있었기에 이 영화는 훨씬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사법제도의 불공정이 비단 이 땅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아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대단히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하긴 영화속 대사처럼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건 신 아니면 피고 뿐이니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제3자가 진실을 가려낸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일지도. 10점만점에 10점을 주고 싶은 법정영화의 걸작.
*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Fuji Television Network/Toho Company/Altamira Pictures Inc.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