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제폰 - 포스트 에반게리온의 한계와 가능성
세상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본의 도쿄만이 남아있게 된 지구... 갑자기 미지의 적으로부터 공습이 시작되고 도쿄는 순식간에 전시 상황으로 변한다. 이끌리듯 숙명적으로 라제폰이라는 로봇과 조우하게 된 소년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진실.. 세상은 도쿄가 전부였다는 사실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푸른피를 지닌 자신의 어머니... 도쿄의 외부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자신만이 움직일 수 있는 라제폰이라는 거대 로봇.. 과연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침체기를 맞고 있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재기를 마련한 것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공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심오하고 철학적인, 그리고 더할 나위없이 나약한 주인공을 내세워 기존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가이낙스의 [에반게리온(이하 에바)]은 전세계 '에바 신드롬'을 가져오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둔다. 잊혀져가는 로봇 메카물의 중흥과 더불어, '생각하게 만드는' 한편의 철학서를 읽는 듯한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GAINAX /Project Eva /TX. All Rights Reserved.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에바가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라제폰] 역시, 훌륭한 퀄리티와 진지한 구성면에 있어서 탁월한 작품임에도 [에바]의 그늘에 가린 채, 유사품처럼 취급받는 것도 [에바]가 지닌 잔광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라제폰]은 [에바]가 아니다!
왜 [라제폰]은 항상 [에바]와 비교선상에 놓이는 불운을 지니게 된 것일까? 하필 다른 로봇물도 많은데 말이다. 굳이 그 이유를 꼽으라면 [에바]의 등장인물들과 오버랩되는 캐릭터의 성격,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주제의식, 선악의 개념을 알 수 없는 존재간의 대립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사실 [라제폰]의 주인공 아야토는 [에바]의 신지처럼 자신이 원해서 파일럿이 된 존재가 아니다. 평범하고 조금은 소심한, 고등학생에 불과한 소년이 지구의 운명을 짊어질 사건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는 설정 자체가 [에바]와 상당히 흡사하다. 그의 조력자 하루카는 마치 [에바]의 미사토를 연상시키며, 그녀의 동생이 메구미의 발랄한 성격은 [에바]의 아스카를, 그리고 신비의 소녀 쿠온은 아야나미 레이의 이미지와 매우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어차피 일본 애니메가 거기서 거긴데, 비슷할 수도 있지 뭐...라고 말한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긴 하다.
[라제폰]이 [에바]의 유사품 취급 받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마치 에바가 미지의 생명체인 사도와 싸우듯, 정체불명의 적인 '도렘'과 싸우는 라제폰은 서로 닮은점이 많다. 도렘을 보내는 MU를 악의 근원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점에 있어서 선과 악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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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에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라제폰]에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것이 [라제폰]을 단순한 아류작으로 보아도 좋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TV시리즈의 종료후 두차례에 걸쳐 극장판을 내놓았음에도 그 결말에 대해 무수한 추측과 의문만을 남기고 사라진 [에바]에 비해 [라제폰]은 비교적 해피하면서도 심플한 엔딩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결말은 기복없이 꾸준히 연결되어 온 극의 흐름과 무난한 융화를 보여주었다.
다만, [라제폰]은 [에바]와 같은 절대적인 상징성을 지닌 아니메가 되진 못했다. 훌륭한 작화,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 수준급의 음악, 드라마의 구성 등 뭐하나 [에바]에 꿀릴 만한 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데는 사실상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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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단적으로 말해 [라제폰]은 시기를 잘못 타고난 불운의 작품이다. 시대적으로 [에바]는 관객들에게 '쇼크'를 줄 만한 파격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 [라제폰]처럼 어렵고, 진지한 분위기의 작품은 이미 소외받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에바]정도의 충격요법으로는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엔 역부족이 셈이었다.
[라제폰]을 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굳이 [에바]와의 비교를 염두해 두지 말자. 여러가주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라제폰]이 시도한 여러 가지 참신한 구성들은 매우 가치있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음악을 통한 공격이라는 색다른 발상과 시차를 뛰어넘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신선하면서도 독특하지 않은가?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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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뽑은 최고의 에피소드는 19화다. 아사히나가 아야토를 위해 지워져가는 기억을 마지막까지 짜내어 그녀의 분신인 도렘과 라제폰의 전투중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장면은 가슴뭉클하게 하는 [라제폰]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준 에피소드였다. 아마 이 에피소드에서 눈물을 쏟지 않은 관객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결론부분은 25,26화에 있어서는 솔직히 너무 '에바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그 결말이 에바와는 달리 비교적 명료하고 해피엔딩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그 비쥬얼이나 분위기는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제작 당시에 최고 수준의 스탭들이 집결해 기대치를 키워놓은 만큼, 작화적인 면이나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 그다지 손색이 없었음에도, [라제폰]은 무엇인가 공허함을 남긴다. 필자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수가 느낀 것인지는 몰라도 [라제폰]이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대중성을 외면한 작품이 가야할 길은 험난한 것이기에....
* [라제폰]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신세기 에반게리온(ⓒ GAINAX /Project Eva /TX.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