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백 - 멧돼지 괴수물의 원조를 찾아서
최근 개봉한 [차우]는 오랜만에 등장한 한국형 괴수물이라는 점에서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또 한가지 반가운 사실은 이 작품이 '멧돼지'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수많은 맹수들을 놔두고 하필 멧돼지라니... 곰이나 사자, 악어 같은 짐승을 소재로 한 작품은 봤어도 멧돼지는 처음이 아닌가 하실 분들도 분명 계셨을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물의 원조는 따로 있다. 1984년작 [레저백]이 그것이다.
[레저백]은 [하이랜더 1,2]로 잘 알려진 러셀 멀케이 감독의 영화로서, 말하자면 그의 상업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일부에선 [레저백]이 러셀 멀케이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1979년작 [Derek and Clive Get the Horn]로 이미 장편영화 데뷔를 마친 상태였기에 틀린 얘기다) 호주 태생으로서 유명 뮤지션들의 뮤직 비디오를 담당했던 MTV 감독인 러셀 멀케이가 크리쳐물로 상업영화에 도전했다는 건 다소 의외이지만 한때 헐리우드의 유망주로서 기대를 모으던 그의 감각적인 연출을 이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그는 듀란듀란의 'Hungry Like The Wolf'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다가 이것이 제작자의 눈에 띄어 [레저백]의 연출을 맡게 되었다.
언젠가도 얘기한바 있듯이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는 신뢰성이 의심스런 것들이 많다. 최근 [차우]의 개봉에 맞추어 관련 정보를 검색하기 위해 웹서핑을 했더니 참 가관이다. 멧돼지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차우]가 리메이크작이라면 [딥 블루 씨]는 [죠스]의 리메이크란 말인가?
[레저백]은 호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소년이 멧돼지에게 끌려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년을 돌보던 할아버지는 아동 살해 및 유기혐의로 심문을 받고 풀려나지만 이 사건의 원흉인 정체불명의 멧돼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탄다.
2년 뒤, 동물 보호운동가인 한 미국여성이 마을에 도착해 캥거루 불법 도살에 대한 취재를 시도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태도는 그다지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유달리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두 형제에게 의심을 품은 이 여성은 어느날 두 형제가 운영하는 캥거루 공장을 몰래 촬영하다 발견되어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어디선가 나타난 멧돼지가 그녀를 습격하고, 형제들은 도주한다.
ⓒ UAA Films/ Western Film Productions/ Anchor Bay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현지 경찰들은 이 사건을 단순 실종으로 처리하지만 뉴욕의 약혼자가 소식을 접하고 마을에 도착, 약혼녀에게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는 멧돼지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노인을 만나게 되고, 이 사건에 캥거루 공장의 두 형제와 멧돼지가 모두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스토리에서 알 수 있듯이, [레저백] 역시 멧돼지의 존재에 올인하는 정통 크리쳐물이라기 보다는 미국에서 온 이방인과 마을 사람들의 대립에 보다 큰 비중을 둔 스릴러물에 가깝다. 저예산 공포영화의 특징인 피범벅 고어 분위기와도 거리가 멀다. 물론 멧돼지가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CG가 없던 시절의 아날로그 특수효과가 사용되었음에도 제법 긴장감이 넘치며, B급 공포물로서의 아기자기한 재미에 충실하다.
ⓒ UAA Films/ Western Film Productions/ Anchor Bay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다소 김빠지는 내러티브가 문제이긴 하나, [레저백]의 진가는 비주얼에서 드러난다. MTV 감독 출신답게 러셀 멀케이가 연출한 비주얼의 스타일리쉬한 감각은 이런 B급영화에는 과분하다 싶을만큼 현란하고 환상적이다. 더군다나 [매드맥스 2], [영 건], [늑대와 춤을]의 촬영감독 딘 샘러가 촬영을 맡은 덕분에 두 사람이 연출해 낸 화면의 시너지 효과는 기대한 것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았다. (훗날 딘 샘러는 괴작 [슈퍼 마리오]에 비공식적으로 연출에 참여한 이후, B급 액션물 [파이어 스톰]과 스티븐 시걸이 주연한 [패트리어트]의 감독을 맡았으나 생각처럼 연출자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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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저백]은 B급영화치고 디테일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히 신경을 쓴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데, 일례로 이 작품을 위해 풀사이즈의 애니메트로닉(실물 사이즈의 로봇) 멧돼지를 무려 25만 달러를 투입해 제작했으나, 이 멧돼지가 영화에 등장하는 씬은 고작 1초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사막지역의 황량한 분위기는 얼마전 러셀 멀케이가 감독한 [레지던트 이블 3]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어 여전히 녹슬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한때 헐리우드의 유망주로서 주목받던 멀케이의 필모그래피 중 [하이랜더]를 빼면 그닥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도 [레저백]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게 된 원인과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1980년대 외화 시리즈에 제법 자주 얼굴을 비췄던 그레고리 해리슨의 핸섬한 모습을 감상하는 건 이 영화의 또다른 묘미이지만, 역시 [레저백]의 가장 큰 의미는 [죠스]로 분수령을 맞이한 괴수물의 다양한 자가증식이 결국 멧돼지라는 소재까지 다다랐다는데 있다. 뭐니뭐니해도 [레저백]은 최초의 멧돼지 어드벤쳐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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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저백]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UAA Films/ Western Film Productions/ Anchor Bay Entertainment.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