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니 - 메멘토의 발리우드식 변주 (2부)
인도는 국어(國語)의 개념이 없는 다언어국가로서 헌법상으로 인정한 공용어는 모두 18개나 된다. 이 중 제1공용어로 규정된 것이 힌디어, 제2공용어는 영어다. 그렇지만 아직도 수많은 지역에서는 각자의 방언과 벵갈어, 펀잡어 등 다양한 언어가 혼용되어 사용되는 것이 인도의 모습이다. 영화얘기 하다말고 갑자기 언어학 강의냐고? 본 리뷰를 들어가기전에 상식적으로 알아둬야할 내용이기 때문이니 너무 당황하지는 말라.
[가지니(2005)]는 인도 남부 최대의 도시이자 중심지인 첸나이를 중심으로 사용되는 타밀어(인도 인구의 약 7%가 사용)로 제작된 영화였다. 이는 감독인 A.R. 무루가도스가 남부출인이기 때문으로서 인도영화치고 꽤나 하드보일드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이유도 인도남부의 투박한 특징을 담고 있어서다.
사실 엄밀히 말해 [가지니(2005)]는 발리우드 영화라고 볼 수 없다. 발리우드란 제1공용어인 힌디어를 사용하는 이른바 '뭄바이' 중심의 영화계를 지칭하며, 타밀어를 사용하는 첸나이 지역 중심의 영화계는 흔히들 '콜리우드(Kollywood)'라 부르기 때문이다. 약 40%의 인도인이 사용하는 힌디어의 비중을 고려해 본다면 발리우드와 콜리우드의 시장크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한때 국내에 수입되었다가 흥행참패를 기록했던 [춤추는 무뚜]의 경우 개봉당시에는 인도전역에서 흥행을 거둔 작품으로 포장된채 홍보되었지만 이 작품도 '90년대 인도남부 영화'의 전형적인 콜리우드 작품이며 실상 흥행성공을 거두었던 건 1998년 일본에서였다. 실제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되는 [가지니(2005)]가 거둬들인 수익은 5백만 달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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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가지니(2005)]가 더 나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발리우드로 발을 넓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무르가도스 감독은 리메이크판 [가지니(2008)]를 만들기 위해 히로인인 아신을 비롯, 가지니 역의 프라딥 싱 라왓, 형사 역의 리야즈 칸 등 원작의 주조연들을 대부분 그대로 캐스팅했다.(의과 여대생 역의 나얀타라는 지아 칸으로 교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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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주인공 산제이 역의 배우는 수르야 시바쿠마르에서 아미르 칸으로 교체되었는데, 그 이유는 칸이 힌디어권 영화계에서 나름 실력있는 연기자이자 가수, 감독, 제작자로 널리 알려진 만능 엔터네이너였기 때문이었다. (인도에는 이른바 '3대 칸'이 있는데 1980년대에 이후 두각을 나타낸 이들 3명의 남자배우는 감성적인 연기로 초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샤룩 칸,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은 출연작을 자랑하는 살만 칸, 그리고 [라간]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바 있는 [가지니(2008)]의 아미르 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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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 명배우 토니 커티스와 [스파이더맨]의 토비 맥과이어를 섞어놓은 듯한 외모의 아미르 칸은 이 작품에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산제이 싱하냐(원작에서는 산제이 라마스와미)를 연기하기 위해 자택에 개인 트레이너를 두고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행한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배역에 대한 강한 애착을 나타냈다.
[가지니(2008)]는 기본적으로 2005년작과 비교해 거의 차이가 없을 만큼 액자식 중첩구성이라는 네러티브의 구조와 상당수 장면들이 동일하지만 몇가지 부면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인다. (스토리는 1부를 참조)
가장 중요한 변화는 '가지니'의 변화다. 이게 무슨말인고 하니, 실상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름을 타이틀로 쓰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 악당의 이름을 내거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런데 왜 2005년작에서는 영화의 제목을 악당의 이름으로 정했던 것일까? 단기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는 주인공이 자기 이름보다도 더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이름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지니(2005)]에서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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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리메이크판 [가지니(2008)]에서는 칼파나가 숨을 거두기 직전에 산제이의 귀에 '가지니'라고 나즈막히 속삭이는 장면을 삽입해 타이틀의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만들었다. 또한 알고보니 쌍둥이었다는 원작의 무의미한 설정을 없애고 단 한명의 가지니로 설정을 바꿨다.
또한 80년대 한국영화 필이 났던 액션과 조명, 세트 디자인은 헐리우드 메이저영화에 버금갈 정도로 세련되게 리메이크했다. 만약 영화 중간에 나오는 뮤지컬씬이 없었다면 이 작품이 인도영화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새롭게 음악감독으로 합류한 A.R. 라흐만은 전작보다 더욱 훌륭한 오리지널 스코어를 선보이는데 결국 그는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아카데미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된다.
배우들은 어떠한가? 전작으로부터 3년, 여자에게는 길다면 충분히 긴 시간이 흘렀지만 칼파나 역의 아신은 더욱 아름다워졌다. 일종의 리허설을 마친것처럼 2005년작부터 연이어 같은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전반적으로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표현력도 훨씬 광범위해진 느낌이다. 다소 투박하고 야성적인 느낌의 수르야 시바쿠마르보다는 미끈한 도시남성의 이미지를 갖춘 아미르 칸과의 앙상블이 더욱 잘 어울린다. (원작의 수르야 시부쿠마르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현실은 냉정한 법이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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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우드에서 발리우드로 자리를 옮긴 [가지니(2008)]는 말그대로 돌풍을 일으켰다. 아미르 칸이라는 슈퍼스타의 후광도 없지 않았겠지만 [메멘토]의 재해석이 이렇게까지 뛰어난 완성도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인도 이외의 영화팬들도 놀라워했다.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38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거둬들였는데, 이는 인도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성적을 갱신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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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타밀어권에서만 알려졌던 아신은 [가지니(2008)]를 통해 인도 전역에서 사랑받는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가지니(2008)]의 흥행성공에 고무된 제작사는 게임업체와 손잡고 '가지니: 더 게임'이라는 게임 소프트웨어를 출시해 인기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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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소재고갈에 허덕이면서도 표절이 아닌 재해석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 [가지니(2008)]는 '복수'를 다룬 하드보일드한 영화의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신데렐라 스토리의 냄새가 풍기는 생뚱맞은 연애담이 갑작스레 펼쳐지지만 영화의 흐름과는 별개로 매우 흥미롭고 몰입도가 높은편이며 두 이야기의 절묘한 조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원작에서 2% 부족했던 결말도 이번에는 완벽하리만큼 깔끔하게 매듭을 짓는다.
[가지니]의 성공은 한국영화계에도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동일한 한가지 설정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각본의 힘, 그리고 필요하다면 같은 감독과 배우에 의해 동일한 작품을 스스로 리메이크하는 발상의 전환도 어느덧 타성에 젖은 국내영화계에서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
* [가지니(2008)]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Geetha Arts.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조: 춤추는 무뚜 (ⓒ 카비타라야 프로덕션. All rights reserved.),가지니: 더 게임(ⓒ Geetha Arts. All rights reserved.), 발리우드 역대 박스오피스(ⓒ Wikipedi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