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니 - 메멘토의 발리우드식 변주 (1부)
한해에 1000편이 넘게 만들어져 헐리우드 제작편수의 3배가 넘는다는 세계 최고의 영화 제작국인 인도의 영화는 1970년대 초 [신상(Haathi Mere Saathi, 1971)]이 최초로 국내에 개봉된 이래 거의 잊혀져 오다가 최근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영향탓인지 한국의 영화팬들에게도 서서히 관심을 불러모으고 있는 듯 하다. 흔히 발리우드로 불리는(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발리우드는 협의적 의미의 인도영화다. 이는 2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인도영화는 날이 갈수록 형식이나 표현면에서 두드러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나 매력도 헐리우드의 식상함에 비하면 훨씬 신선미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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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현 시점에서 드러나는 발리우드의 문제는 (이제는 기실 인도영화의 문제만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겠지만) 뛰어난 각본의 부재다. 이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발리우드 영화계가 선택한 길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표절'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을 인도식으로 카피한 [칸테(Kaante)]에서부터 한국의 [올드보이]를 무단으로 베낀 [진다(Zinda)]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최근에는 성룡의 [미라클]을 표절한 [싱은 왕이다 (Singh is King)]가 인도 박스오피스의 정상에 올랐던 기현상은 발리우드 영화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러나 재밌는 사실은 [싱은 왕이다]의 표절대상이었던 [미라클]조차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1961년작 [포켓에 가득한 행복(Pocketful of Miracles)]을 차용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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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표절과 차용의 경계를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인도영화의 도덕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릴 것인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베끼고 표절하는 가운데서도 주목할 만한 재창조가 이뤄진다는 점은 제법 눈여겨봐둘 만한 가치가 있다.
A.R. 무루가도스 감독의 2005년작 [가지니(Ghajini)]는 두가지 의미에서 눈길을 끈다 그 중 한가지는 이 영화의 설정 중 일부가 헐리우드의 [메멘토]와 닮아있다는 점이고 나머지 한가지는 이 글의 말미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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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놀란의 헐리우드 데뷔작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집요한 복수극이라는, 조금은 독특한 설정과 더불어 시간의 역순 배치와 액자식 구성의 절묘한 플롯 조화로 난이도 높은 지적인 스릴러의 장을 열었던 수작이다. 특히나 기억을 10분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의 설정은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나 자신도 종종 나의 나쁜 기억력을 빗대어 메멘토 증상이라고 우스게소릴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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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니(2005)]는 바로 [메멘토]의 설정 중에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대한 부분만을 차용한 독특한 영화다. 물론 몸에 문신을 하는 주인공이라든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불태운다는 설정 자체도 [메멘토]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가지니(2005)]는 [메멘토]와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작품이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일단 [가지니(2005)]의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의과대학의 수업시간 중 뇌에 대한 강의가 끝난 후 한 여학생이 뇌질환과 관련된 검색하다가 자신의 기억을 15분이상 유지하지 못하는 산제이(수르야 시바쿠마르 분)라는 남자의 기록을 발견한다. 어느날 괴한의 습격을 받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었다는 그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장면이 바뀌고 두 남자가 생사를 넘나드는 살벌한 싸움을 벌인다. 그 중 한명은 삭발을 했고, 머리에 큰 상처가 보이며 눈은 증오로 이글거린다. 이 남자가 바로 산제이다. 그는 자신이 쓰러뜨린 남자의 모습을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은 뒤 몸을 수색하다가 전화기에서 '가지니'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뒤이어 형사(리야즈 칸 분)가 살인사건의 현장을 조사하게 되는데 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또 한사람, 암흑가의 보스인 가지니(프라딥 싱 라왓 분)가 부하의 의문스런 죽음에 분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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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산제이의 주소지를 알아낸 형사는 산제이를 결박하고 그의 집을 뒤지던 중, 그의 과거사가 기록된 일기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기억상실 이전의 산제이와 그의 연인 칼파나(아신 분)와의 애절하고 슬픈 이야기에 놀라고 만다.
이제 영화는 산제이가 유망한 핸드폰 그룹의 회장으로서 한 3류 광고회사의 모델이던 칼파나를 만나게 된 경위와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 대답을 기다리기까지의 과정에 1시간 정도를 할애하면서 액자식 구성의 이야기를 진행해 나간다. 한때 핸드폰 회사의 CEO였던 산제이와 칼파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왜 산제이는 증오심에 가득찬 기억상실자가 되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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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스토리 라인만을 읽다보면 [가지니(2005)]와 [메멘토]사이의 유사점에 눈길이 가는게 사실이지만 실제 영화를 접하고 나면 그런 표절의 의혹따윈 아무래도 좋을 만큼 [가지니(2005)]는 독창성이 뛰어난 영화다. 무루가도스 감독이 [메멘토]의 단기 기억상실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당당하게 말할만큼 표절의혹에 대해서 감독 스스로도 떳떳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가지니(2005)]는 [메멘토]가 보여주었던 스릴러적인 요소보다는 액자식 구성 가운데 나오는 산제이와 칼파나의 애절한 러브스토리에 주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를 영화속에서도 1,2부로 끊어서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등 적절한 플롯의 배치가 돋보인다. 물론 현실속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 산제이와 정체불명의 조직과의 대결,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들게 된 여대생과의 아슬아슬한 스토리도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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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영화라면 빼놓을 수 없는 뮤지컬 시퀀스도 영화속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편인데 (그 때문에 영화의 러닝타임은 무려 3시간에 육박한다), 이런 인도영화의 특징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관객이라도 이번만큼은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노래와 춤에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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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연기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낸 칼파나 역의 아신은 그 천사같은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만큼 매력적이다. 아신이라는 배우 자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기에 [가지니(2005)]의 스토리가 더욱 애절하게 느껴질 정도다. 대기업의 CEO와 복수의 화신이라는 양면성을 연기한 수르야 시바쿠마르의 연기와 1인 2역의 쌍둥이 악당 가지니를 연기한 프라딥 싱 라왓도 매우 좋은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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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단점이라면 액션 시퀀스와 동선의 배치, 그리고 카메라 워크 등에서 다소 촌스런 80년대의 한국영화식 연출을 연상시킨다는 것인데, 이를 염두한 탓일까? 감독은 2008년에 이 작품의 리메이크를 시도하게 된다.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헐리우드나 다른 나라로 건너가 직접 리메이크하는 경우는 여러번 있었지만 이렇게 스스로가 자국내에서 그것도 3년만에 리메이크를 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물론 이 같은 현상은 인도라는 나라의 특성 때문인데 이 점은 다음 리뷰에서 다루도록 하자) 이것이 [가지니(2005)]가 가진 두 번째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제 새롭게 만들어진 [가지니]는 어떤 모습으로 재탄생했을까? 다음 리뷰에서는 2008년작 [가지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 [가지니(2005)]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Leo Entertainment Pvt. Ltd.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메멘토(ⓒ Newmarket Capital Group/ Summit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칸테(ⓒ White Feather Films/Film Club/PNC. All rights reserved.),신상(ⓒ Devar Film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