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즈 오브 프레이 - 고담시를 수호하는 여성 트리오의 이야기
1988년. 고담시의 다크 나이트, 배트맨은 자신의 둘도없는 동료를 잃고 만다. 앨런 무어의 [킬링 조크]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그래픽 노블로서, 고든 총장의 딸이자, 배트걸로 활약중이던 바바라 고든이 조커가 쏜 총탄에 하반신 불구가 되는 끔찍한 사고에 대해 언급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바바라 고든은 신체적 한계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휠체어 신세가 되었지만 곧 '버즈 오브 프레이(Birds of prey)'라는 팀을 구성해 고담시의 크라임 파이터 '오라클'로서의 새 삶을 시작한다. 버즈 오브 프레이는 오라클의 진두지휘하에 헌트리스와 블랙 카나리가 주축이 되어 구성된 여성팀으로 후에 더 많은 사이드킥이 가담하게 되어 고담시의 범죄자들과 맞선다.
'배트맨'시리즈의 스핀오프로 출발한 '버즈 오브 프레이'는 다분히 페미니즘 성향이 두드러지는 작품으로서 DC코믹스 중에서도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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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배트맨과 로빈]이 흥행에 참패한지 2년뒤인 1999년, 톨린-로빈스 프로덕션은 각본가 팀 멕켄리스로부터 '배트맨'의 TV드라마에 대한 구상을 제안받는다. 멕켄리스가 제안한 스토리는 브루스 웨인의 18세 전후를 시점으로 배트맨의 초기 연대기를 장기간에 걸쳐 방영하되 주변 인물에 큰 비중을 두어 하비 덴트, 셀리나 카일, 잭 네피어, 바바라 고든과 루시우스 폭스 등 다양한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으로 각 캐릭터들의 변천과정을 모두 망라할 예정이었다.
멕켄리스의 제안에 흥미를 보인 프로덕션은 당장 새로운 배트맨의 TV시리즈를 제작하기 위해 판권을 소유하고 있던 워너 브라더스와 조율을 시도한다. 그러나 워너측은 TV시리즈 보다는 여전히 극장용 영화에 관심을 나타냈고, 이듬해 20세기 폭스사의 [엑스맨]이 유래없는 흥행성공을 거두자 TV판의 기획은 더 이상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이클 톨린과 브라이언 로빈스는 DC 코믹스의 '슈퍼맨'을 프리퀄로 구성한 [스몰빌]의 성공을 통해 TV시리즈도 충분히 승산이 있음을 확신했다. 이들은 극장판에 밀린 배트맨의 프리퀄 계획대신 '배트맨과 조커가 없는 고담시란 어떤 모습일까?'에 초점을 맞추기로 결정한다. 2002년작 [버즈 오브 프레이]는 앞서 언급한 동명의 코믹스에 바탕을 둔 TV 시리즈이자 최초로 포스트-배트맨 시대를 다룬 실사 드라마가 되었다. 1
ⓒ Warner Bros. Television/ Tollin-Robbins Productions. All rights reserved.
배트맨은 8년전 조커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후 사라졌고, 조커마저 어디론가 잠적한 상태다. 잠적하기 전 조커는 배트맨의 주변 인물을 하나씩 제거했고, 그 중에는 배트맨의 연인인 캣우먼과 총탄으로 하반신 마비가 된 바바라 고든도 포함된다. 그런데 배트맨과 캣우먼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헌트리스', 헬레나 카일이다. 여기에 '블랙 카나리'의 딸, 다이나 랜스가 가담해 '버즈 오브 프레이'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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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오브 프레이]는 원작의 설정을 상당부분 뜯어고쳐 (나쁜 말로는 설정파괴에 가깝다) 팬들의 원성을 샀다. 먼저 헌트리스의 경우, 원작에서는 크라이시스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데 크라이시스 이전 배트맨과 캣우먼 사이의 딸인 헬레나 웨인으로 설정되긴 했지만 이후 세계관이 리셋되어 마피아 보스의 딸 헬레나 로자 베스티넬리로 확정된 것을 생각하면 역시 원작의 설정을 따른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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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배트맨이 사라진지 고작 8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배트맨'의 존재는 사람들 사이에 그저 도시전설 속에 등장하는 괴담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도 설득력이 부족한 부분이다. 그외에 노 맨스 랜드(No man's land)가 단지 메타 휴먼들이 모이는 클럽 정도로 바뀐것도 원작과는 다르다. 3
그렇지만 [버즈 오브 프레이]는 원작의 캐릭터를 상당부분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나 그동안 실사영화에서 봐오지 못했던 원작 속 캐릭터들이 등장한다는 점은 꽤나 흥미로운데, 이 시리즈의 명실상부한 보스급 악당으로 '할리 퀸'이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실사버전을 보고 싶어했던 팬들의 마음을 무척 설레게 할 것이다. 주인공 헌트리스는 평상시 할리 퀸의 얼터 에고인 닥터 할린 퀸젤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으로 나오는데, 서로가 숙적이면서도 상대방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설정은 [무간도]처럼 서로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가는 플롯의 묘미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 흥미로운 설정은 시리즈를 급히 마무리짓는 과정에서 엉망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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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의 에피소드에서는 원조 '블랙 카나리'도 등장하는데, 그녀의 등장은 다소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다이나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한몫을 다하며 또한 원작의 또다른 악당 '클레이 페이스'가 등장하는 것이나 '레이디 시바'가 오라클의 숙적으로 등장하는 점, 그리고 이야기의 나레이터이자 중요한 조연 캐릭터인 알프레드 페니워스의 존재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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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캐스팅에 있어서 원작의 파워풀한 크라임 파이터 보다는 늘씬한 모델의 느낌에 가까운 헌트리스 역의 애쉴리 스콧이나 천방지축의 틴에이저로 변질된 다이나 역의 레이첼 스카슨은 다분히 미스 캐스팅 논란의 여지가 있는 반면, 오라클 역에는 [스타쉽 트루퍼스], [쏘우 1,2,3]의 디나 마이어가 캐스팅되었는데, 영화속에서 다소 터프한 캐릭터를 주로 맡은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지적이며, 여성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바바라 고든의 캐릭터를 비교적 훌륭히 소화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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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더해 레이디 시바 역으로 이승희가 등장하며, 파일럿 방영분에 등장한 조커의 목소리는 [배트맨 TAS]에서 성우로 열연을 펼친 마크 해밀이 목소리를 맡아 팬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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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 오브 프레이]는 비록 11화가 방영할 즈음 제작이 취소되어 총 13화로 조기종영한 불운의 작품이긴 하지만 파일럿조차 방영되지 못한 괴작 [저스티스 리그]에 비하면 훨씬 흥미로운 작품이다. 풍부한 DC 유니버스의 캐릭터를 활용한 전례로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며, 특히 악당이나 주인공 할것없이 여성 캐릭터들을 메인급으로 등장시킨 최초의 작품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단 배트맨은 초반 인트로 화면 외에는 시리즈가 끝날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 [버즈 오브 프레이]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Warner Bros. Television/ Tollin-Robbins Productions.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버즈 오브 프레이 코믹스 (ⓒ DC Comics. All rights reserved.)
- 이 계획은 결국 2005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비긴즈]로 실현된다. [본문으로]
- 마피아의 자식으로 아버지와 갈등을 겪는 설정은 [버즈 오브 프레이]에 등장하는 또한명의 캐릭터, 리즈 형사에게 투영된다. 그 역시 마피아 보스의 아들로 형사라는 직업을 선택해 원작에서 헌트리스가 겪는 동일한 분노와 갈등을 경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본문으로]
- 고담시 전체를 뒤흔든 대지진 사건 이후 아캄 수용소에 수감중인 다수의 악당들이 탈출했고 이에 미합중국은 고담시가 미국영토에서 제외되었음을 선언한다, 이로인해 고담시는 '노 맨스 랜드'라 불리게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