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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단의 최후 - 국제 경찰, 국제 테러단, 여우 그리고 겟타 로보

페니웨이™ 2016. 9.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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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한국 만화계에는 외자로 된 이름을 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절이 있었다. 향원, 향수, 강철, 임창, 하룡, 하청 등 1960년대 중후반을 거치면서 수많은 작가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에는 필명과 화풍까지도 비슷해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사태가 빈번했다.

물론 이 당시 순수 창작활동을 통해 명성을 얻은 작가도 많았지만 일부의 경우 작화나 스토리를 이끌어갈 능력, 즉 작가적인 역량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사람이 무명 만화가를 고용해 하나의 필명으로 작품을 내놓는 식의 편법으로 돈을 버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건 일본 만화를 개작, 번안해 마구 찍어내는 식의 행태였고, 이런 방식으로 유명했던 작가 중 하나가 바로 향수였다.

사실 향수는 실체가 존재하는 특정 인물이라기 보단 일종의 ‘만화공장’이었다. 향수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을 그린 작가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유명한 작가 (물론 먼 훗날의 일이지만)도 있었고, 이 작가들을 섭외해 회사를 운영했던 인물은 직접 그림을 그리는 만화가가 아니라 사업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고 한다.[각주:1]

 

ⓒ진흥출판사

향수 작가가 1965년에 발표한 SF물 [정의의 사자 해저인]

 

어찌되었건 혼탁한 만화계를 정화하기 위해 만화가로서의 자질이 없는 유령작가를 퇴출하려는 운동이 한국만화협회의 주도하에 이루어지자 외자로 된 필명을 쓰던 작가들도 대부분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향원은 이향원으로, 강철은 강철수로, 하청은 하고명으로 필명을 고치며 새로운 이름으로 작품을 내놓게 된 것도 대략 이 즈음이다.

그렇다면 향수는 어떻게 되었을까? 향수 팀에 몸담았던 실력파 작가들이 독립해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만화협회의 정화작업이 실체없는 작가의 퇴출에 목적을 두었던 만큼 향수라는 필명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를 이어 1980년대 초까지 작품활동을 한 박향수라는 필명이 등장했고, 한동안은 향수프로덕숀이라는 자체 출판사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박향수란 작가가 향수와 동일한 인물, 혹은 동일한 사업가의 새로운 유령 작가명이었는지는 100% 확신하기가 어렵다. 

 

ⓒ향수프로덕숀

향수프로덕숀을 통해 출간된 성인극화 [엔테베 특급작전]

 

어쨌거나 성인용 만화에서부터 스포츠, SF, 무협물 등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박향수 작가는 이 만큼의 다작활동을 할 정도였다면 만화계에서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한 거물급 만화가로 성장했을 법도 한데, 어느 순간 만화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한 걸 보면 역시나 가공의 필명을 쓴 어느 무명작가(혹은 작가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박향수는 후기로 갈수록 [은하계의 침입자], [달려라 철인소년]과 같은 몇편의 로봇물도 남겼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창작물이라고 보기엔 스토리나 메카닉 디자인이 현란하게 짜깁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령 [은하계의 침입자]에서는 마징가 제트의 몸통에 가슴엔 [슈퍼맨]의 ‘S’자 마크가 그려진 로봇이 등장하는데, 얼굴은 ‘겟타 로보’에 ‘로보트 태권브이’를 섞어놓은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한 [달려라 철인소년]에서는 영락없는 ‘로보트 태권브이’의 악당버전 같은 모습의 ‘로봇마인’이 등장해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만든다.

ⓒ 백조문고

갯타 로보의 얼굴에 가슴엔 슈퍼맨의 S자 로고가 새겨진 묘한 로봇이 등장하는 [은하계의 침입자]

 

클로버문고를 통해 출간된 [X단의 최후]도 이러한 박향수 작가의 스타일이 그대로 드러나는 작품이다.

B국의 중심부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X단은 일종의 테러집단으로 외형상 선한 일을 하지만 이면으로는 사회와 국가를 좀먹는 악의 소굴이다. 이들은 대량의 로봇을 생산하고, 고성능 미사일 탄도단을 설치하는가 하면 각 위성도시에 전투 비행대를 배치해 언제라도 전쟁을 일으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

X단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은 외계에서도 벌벌 떤다는 국제경찰 수비대. 국제 경찰 소속의 한국인 박철은 아버지가 연구하던 푸른액체의 개발을 위해 대도시 상지울에 도착한다. 푸른 액체란 주사를 놓기만 하면 사물이 커지는 특수 용액이다. 박철의 뒷조사를 하던 X단의 쏘니는 우연히 푸른액체가 담겨있던 빈 용기를 손에 넣지만 용액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조직에 의해 끔찍한 보복을 당한다.

ⓒ 어문각

한편 박철은 갑자기 나타난 X단의 협박으로 푸른액체의 제조를 강요당하지만 비장의 무기인 ‘사탄 V호’를 호출해 X단의 부하들을 일망타진한다. 이어서 박철은 홀로 적의 아지트에 침투했다가 곧 위기에 빠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사탄 V호를 호출한 박철은 적을 모두 물리치고 X단의 수장인 샤르엔을 체포한다.

도심지를 중심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던 X단은 이렇게 사라졌지만 그 잔당이 모여 또 다시 모의를 한다는 첩보가 입수된다. 이번에는 단독 임무를 수행하던 박철이 X단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쏘니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각자 경쟁하듯 적의 비밀기지를 찾아가던 도중에 또다시 X단에 사로잡히고 만다. 뜻밖에 이 위기를 해결해 주는 건 은혜를 베풀었던 여우 한마리다. 

ⓒ 어문각

월간 <새소년>에서 [지구 방위대 출동]이라는 제목의 별책부록으로도 제공된 바 있는 [X단의 최후]는 앞서 출간된 [달려라 철인소년]과 여러가지 면에서 대동소이한 작품이다. 가령 X단이라든가 주인공 철이, 푸른액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는 설정 등 약간의 변화만 주었을 뿐 동일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두 편의 작품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온다.

국제적인 테러집단과 맞서는 큰 스케일, 그리고 1,2부로 나뉘어 1부에서 조직에 버림받은 쏘니와 주인공 철이가 2부에서는 연합작전을 펼치는 제법 흥미로운 플롯에도 불구하고 [X단의 최후]의 완성도는 그리 높지 않다. 애당초 ‘사탄 V호’를 이용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인데, 주인공이 굳이 적진에 침투해 위기를 자초하고 막판에 가서야 도움을 받는 어리석음은 그렇다 치자. 2부격인 ‘거미인간들’편에서 맹활약할 것으로 기대됐던 쏘니는 별다른 활약없이 X단의 포로가 되었다가 언제 퇴장했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고, 자신을 도와준 주인공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여우가 갑자기 등장하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무런 고민없이 불쑥 전개된다.

여기에 ‘겟타 드래곤’을 빼다 박은 ‘사탄 V호’의 등장은 화룡정점을 찍는다. 이미 박향수 작가는 [달려라 철인소년]에서도 속표지에 ‘겟타 드래곤’과 흡사한 로봇을 그려넣은 적이 있는데, 이왕 그렇게 했던 거 까짓것 이번에는 눈 딱 감고 본격적으로 써먹어보자하고 등장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잡탕찌게 같은 내용과 짝퉁 ‘겟타 드래곤’의 사용 등 [X단의 최후]는 여러모로 문하생의 습작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꽤 오랜 기간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박향수 작가는 80년대 초까지도 작품을 낸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 마지막 작품을 내기까지 박향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지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이 전무한 지금 [X단의 최후]를 그린 진짜 작가가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전혀 알 수 없는데다 다소 함량미달인 듯한 작품이 한 편도 아니고 어떻게 두 편씩이나 나름 메이저 레이블이었던 클로버문고의 작품으로 선정될 수 있었는지도 이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단, 본문의 내용은 작성자에게 권리가 있습니다.

* 예전 만화를 찾습니다. 기증, 대여 등을 통해 작품을 소개하고 싶은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1. 향수(만화가 지망생 집단)의 작품이 2015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발행한 만화포럼 Kan에 의하면 99% 일본의 작품을 트레이싱한 것으로 이 문제로 인해 만화가 협회에서 제명되었다고 알려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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