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괴작열전(怪作列傳) : 에도 킹콩 - 잃어버린 일본 최초의 괴수영화를 찾아서

페니웨이™ 2014. 2. 18. 09:00
반응형

괴작열전(怪作列傳) No.138

 

 

 

 

 

 

 

필름 보존과 복원. 이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내 컨텐츠의 중요성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 한국 영화계의 숙원과제 중 하나입니다. 이미 영상자료원에서는 많은 고전 영화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지만 그 복원의 수준이 해외의 '리마스터링' 판본과 비교되기엔 너무 열악한게 사실입니다. 

일례로 원본 필름이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던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을 스크린으로 관람할 수 있었던 건 가슴벅찬 경험이었지만 오프닝 크래딧에 '소년용자 홍길동'으로 소개되는 제목과 더불어 일본어로 된 스텝들의 이름을 봐야 한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최초의 극장 애니메이션'이 일본인에 의해 보존되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 돌꽃컴퍼니. All rights reserved.

△ [홍길동]의 오프닝 타이틀. 한국어 홍길동 대신에 '소년용자 홍길동'이라는 일본어가 뜨는 필름이 그나마 최초의 한국 극장 애니메이션 복원판의 가장 완벽한 버전이다.

 

 

또한 마스터 필름의 부재로 열악한 화면으로만 감상이 가능했던 [로보트 태권브이]도 막대한 사업비를 들여 간신히 복원에 성공했지만 오리지널 오프닝과 엔딩이 잘려나가고 중간중간 삭제씬을 복원하지 못한 미완의 모습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현실은 과거 필름 관리가 얼마나 부실했는지를 절감케 만듭니다. 태권브이 시리즈 중 가장 접근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졌던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의 VHS가 엉뚱하게도 스페인에서 발견되었다든가 그 밖의 사라진 애니메이션 판본들이 해외에서 속속 발견되는 걸 보면 참담한 심정이 들지요.

ⓒ (주)로보트 태권브이. All rights reserved.

 

반면 옆나라 일본의 필름 관리는 대단히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단 영화 뿐만이 아니라 만화나 그 밖의 문화컨텐츠에 대한 가치가 존중받는 까닭에 몇십년이나 된 데즈카 오사무의 초기작들을 깨끗한 판본으로 싼값에 사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이런 점만큼은 정말 부럽달까요. 하지만 말입니다, 일본이라고 모든 영화를 잘 보관하고 있는건 아닙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해요.

흔히들 괴수물의 대표작으로 혼다 이시로 감독의 1954년 작 [고지라]를 떠올리실 겁니다. 보존상태가 매우 훌륭한 이 작품은 일본 괴수영화의 효시로도 알려져 있지요. 그런데 사실상 [고지라]는 엄밀히 말해 일본 최초의 괴수영화는 아닙니다. 조금 의외라구요? 네 의외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분명히 해둘 건 [고지라]가 '현존하는' 일본 최초의 괴수영화이지, 문자 그대로의 최초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TOEI. All rights reserved.

 

그렇다면 최초의 일본 괴수영화는 무엇일까요? 시간은 19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전 장르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1933년이 영화사에 획기적인 충격을 가져온 작품이 개봉되었다는 사실을 아실 겁니다. 바로 어니스트 B. 쇼드사크와 머리안 C. 쿠퍼 감독의 [킹콩]이었지요. 당시 일본에서 RKO와 배급계약을 맺었던 영화사는 쇼치쿠 사였는데요, [킹콩]의 엄청난 흥행을 목격하고는 일본판 [킹콩]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 RKO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와세이 킹콩] 일명 '저페니스 킹콩'으로 불리는 작품입니다. 흑백으로 만들어진 단편무성영화인 [와세이 킹콩]은 스톱모션을 이용한 오리지널 [킹콩]과는 달리 미니어처 세트에 킹콩 슈트를 입은 사람이 킹콩을 연기하는 식으로 만들어진 일본 최초의 괴수물이었습니다. 스토리는 대략 오리지널를 그대로 각색한 것으로 추정될 뿐, 그 이상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와세이 킹콩]에 관해 전해지는 건 단 두 컷의 스틸 뿐이지요. 분명한 건 [와세이 킹콩]이 RKO로부터 저작권 계약을 맺지 않은 무판권 작품이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 Shochiku Company. All rights reserved.

 

그로부터 5년 뒤, 젠쇼 시네마라는 회사에서는 [킹콩]을 변주한 자기만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물론 [와세이 킹콩]과는 달리 정식으로 말이지요. 결국 젠쇼 시네마는 RKO와의 협상끝에 [킹콩]의 판권을 구입하는데 성공, [에도에 나타난 킹콩 江戸に現れたキングコング] 2부작 (변화의 권 変化の巻・황금의 권 黄金の巻)을 기획하게 됩니다. 흔히 [에도 킹콩]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장편 유성영화로 이후에 일본 영화사의 전설처럼 기록된 작품입니다.

우선 [에도 킹콩]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지요. 이 작품의 시대배경은 에도시대입니다. 어느날 무사 토바 호우에의 딸인 치나미가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합니다. 광분한 호우에는 딸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현상금을 주고 희망에 따라서는 그녀와 결혼을 시켜주겠다는 공약을 내걸게 되지요. 많은 사무라이들이 수색에 나서지만 사건의 전말은 주인공인 마고노조우의 음모로서 자신의 아버지가 아끼던 유인원을 이용해 치나미를 납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고노조우의 아버지는 토바에 의해 유폐당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고,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기회를 엿보던 참이었습니다. 마고노조우는 토바에게 딸의 행방을 알려주는 댓가로 돈을 요구하며 그를 지하실로 유인하는데 성공, 유인원을 이용해 아버지의 복수를 갚는데 성공하지만 유인원도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죽어가는 유인원을 뒤로 한채 마고노조우는 현상금을 챙겨 먼 나라로 도피길에 오른다는 내용입니다.

ⓒ Zenshō Cinema. All rights reserved.

 

'일본판 킹콩'을 만들겠다는 야심찬 의도와는 달리 [에도 킹콩]은 매우 짧은 기간에 완성된 작품입니다. 대략 촬영은 1938년 2월 상순에서 중순에 걸쳐 진행되었고 촬영이 시작된 지 한달 후에 작은 광고가, 그리고 그 다음 주 키네마준보 641호에 전면 광고가 실렸습니다. 다만 촬영 완료 후 실제 극장 상영까지 걸린 시간이 타사의 작품에 비해 다소 길었는데, 이는 젠쇼 시네마가 대형 영화사처럼 직영관을 소유하지 못했고, 제작에서 배급, 개봉까지의 확고한 라인을 확보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에도 킹콩]은 단관 개봉을 감행해 어느 정도 좋은 흥행성적을 거둔 것 같지만 제작사가 마이너 회사였는데다 제작완료 후에도 필름 배급에 애를 먹었던 것으로 보아 작품 자체의 유명세는 그리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작품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는 [와세이 킹콩]과 마찬가지로 [에도에 나타난 킹콩] 역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투하로 인해 원본 필름이 유실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이너 회사의 인지도 떨어지는 영화다 보니 수출 등으로 해외 반출이 시도되지 않았고 따라서 제 아무리 필름 보관 인식이 높은 일본이라 하더라도 원폭의 잿더미 속에서 이 영화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는 의미죠.

따라서 [에도 킹콩]에 대한 추측과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며 이마저도 억측과 각종 주장이 난무합니다.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자료는 키네마준보에 실렸던 전면 광고인데요, 이 광고에 나온 사진만 가지고 이 영화에 대한 몇가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킹콩의 디자인은 고릴라보다는 설인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괴수를 표현한 건 슈트방식이며, 이는 마스크에 드러나는 배우의 눈으로 보아 분명해지지요. 이 작품에서 슈트를 만든 사람이 바로 후미노리 오하시 인데요, 훗날 [고지라]의 슈트디자인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 Zenshō Cinema. All rights reserved.

 

게다가 스틸컷으로 보여지는 유인원은 마치 오리지널 [킹콩]의 거대한 크기를 연상시키지만 막상 다른 스틸컷이나 내용으로 유추해 보면 여기서 등장하는 킹콩은 유수의 [킹콩] 아류작들에서 차용한 거대 괴수가 아니라 사람 크기의 애완동물 정도로 설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고지라] 이전에 만들어진 거대괴수물이라는 인식은 1933년 [와세이 킹콩]에 한정될 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 Zenshō Cinema. All rights reserved.

 

앞서 살펴보았듯이 [에도 킹콩]의 이야기는 오리지널 킹콩을 일본식 사무라이 시대극으로 변용되었습니다. 모험과 사랑 대신 가족사가 얽힌 복수극의 테마를 사용하고 있지요. 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인데요, 아쉽게도 필름은 물론 관련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더 이상의 정보는 구할 수가 없습니다. 킹콩의 정체라든가 이 영화가 1,2부로 나뉘어서 개봉하게 된 경우랄까 그 밖의 여러가지 미스터리는 원폭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요.

전 세계의 영화팬들은 이 사라진 영화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기도 한데요, 영화사이트인 필름 트리트에서는 "잃어버린 영화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으며 AVGN의 실랄한 비평가 제임스 롤프도 [에도 킹콩]과 [와세이 킹콩]을 "잃어버린 호러 영화 1순위"로 올려놓기도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킹콩의 흉내내기로 시작된 일본 괴수물의 역사는 혼다 이시로 감독의 [고지라]로 본격적인 포문을 열었고,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일본산 킹콩 또한 고지라의 부활에 편승해 1962년 [킹콩 대 고지라]로 부활하게 됩니다. 헐리우드와 합작해 만든 [킹콩 대 고지라]의 괴작 포스도 역대급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실체가 사라진 [에도 킹콩]에 더 관심이 가는 건 왜일까요?


ⓒ TOEI. All rights reserved.

 

 

*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단, 본문의 내용은 작성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