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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 한국형 그래픽 노블의 모범답안

페니웨이™ 2013. 7. 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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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까지만해도 국내에서는 생소한 단어였던 그래픽 노블은 현재 코믹스와는 별개로 ‘성인들을 위한 만화’의 의미로 통용되는 듯 하다. 1978년 윌 아이즈너가 ‘코믹스는 멜로디, 그래픽 노블읜 교향곡’이라는 비유를 들어가며 통상적인 아동 코믹스와 성인 취향의 진지한 코믹스를 구분짓는 용어로 사용했지만 실상 ‘그래픽 노블’이라는 단어의 원론적 의미를 보자면 그림보다는 그림의 분량이 많은 일종의 ‘삽화 소설’에 가까울 것이다.

아직 한국에서는 [왓치맨]의 앨런 무어나 [다크 나이트 리턴즈]로 유명한 프랭크 밀러 같은 전문 그래픽 노블 작가는 없지만 원론적인 의미의 그래픽 노블 작가를 찾아보자면 의외로 오래 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삽화체 만화가인 박광현, 박기당과 더불어 한국 만화계의 전설과도 같은 존재인 김종래 화백은 마치 소설책을 읽듯 진지하고 짜임새 높은 스토리와 더불어 한 편의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화풍으로 독자들을 매료시켰던 시대극화의 일인자였다.

그는 살아생전에 무려 500여종에 이르는 작품을 발표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는데, 예나 지금이나 일본풍의 만화 스타일의 자장에서 벗어나기 힘든 국내 만화계의 풍토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화풍을 개발해 펜터치와 그림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높은 오리지널리티를 자랑한다.

그런 김종래 화백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도망자]다. 이 작품은 1969년부터 연재가 시작된 이래 무려 10년 넘게 장기연재가 된 초장수 베스트셀러인데, 1963년에 미국 ABC 방송에서 방영된 동명의 TV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이 작품은 1993년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도망자]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작가 특유의 재해석이 가미되어 그러한 느낌은 전혀 받을 수 없다. 마치 1886년 이탈리아의 동화작가 에드몬도 데 아마치스의 [마르코]를 각색했던 동 작가의 [엄마찾아 삼만리]가 그러하듯 김종래 화백의 각색은 대단히 뛰어나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망자]는 시골 선비인 주인공 윤태호가 어느 누추한 민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가 다음날 살인 용의자로 몰리면서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는 내용이다. 그의 누명을 벗겨줄, 그리고 간밤에 일어난 살인사건의 전모를 아는 유일한 사람인 검은 점의 여인을 찾기 위해 조선 팔도를 방황하는 주인공은 수많은 인물들과 마주하며 각종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때론 사건의 피해자이자 당사자로, 때로는 해결사로 종횡무진 활약을 펼치며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도망자]의 매력은 주인공이 겪는 사건들과 민초들의 모습이 작가가 활동하는 6,70년대의 사회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데 있다.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쓰고도 하소연 한번 하지 못한채 이리저리 숨어다니는 주인공의 처지에서 당시의 독자들이 쉬이 공감할 수 있었던 이유다.

[도망자]는 다른 삽화체 만화에 비해 그림과 말풍선의 비중이 높은 편이지만 그럼에도 풍부한 대사량과 해설이 곁들여져 이른바 ‘한국형 그래픽 노블’의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한동안 잊혀져 있다가 2003년에 1,2권으로 복간되었지만 10여년간 연재된 방대한 원고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단 1000부만이 한정생산되어 접하기가 쉽지 않다.

워낙 오래전의 기억이라 주인공 윤태호가 과연 누명을 벗었는지 어쨌는지 미스터리의 열쇠인 검은점의 여인과는 어떤 결말을 내었는지 도무지 알 턱이 없으니 답답하다. 과연 이 궁금증을 해소할 날이 올지 조차도 모르겠다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 훌륭한 토종 그래픽 노블을 요즘 세대들은 접할 길이 없다는게 더욱 더 안타까울 따름이다.


 

* 이 글은 만화규장각에 기고한 컬럼을 블로그에 맞게 리뉴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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