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ㄹ,ㅁ.ㅂ

라제폰 - 포스트 에반게리온의 한계와 가능성

페니웨이™ 2007. 8. 1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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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본의 도쿄만이 남아있게 된 지구... 갑자기 미지의 적으로부터 공습이 시작되고 도쿄는 순식간에 전시 상황으로 변한다. 이끌리듯 숙명적으로 라제폰이라는 로봇과 조우하게 된 소년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진실.. 세상은 도쿄가 전부였다는 사실이 모두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푸른피를 지닌 자신의 어머니... 도쿄의 외부에 펼쳐진 또 다른 세상... 그리고 자신만이 움직일 수 있는 라제폰이라는 거대 로봇.. 과연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침체기를 맞고 있던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의 재기를 마련한 것은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공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심오하고 철학적인, 그리고 더할 나위없이 나약한 주인공을 내세워 기존의 형식을 완전히 파괴하는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가이낙스의 [에반게리온(이하 에바)]은 전세계 '에바 신드롬'을 가져오는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둔다. 잊혀져가는 로봇 메카물의 중흥과 더불어, '생각하게 만드는' 한편의 철학서를 읽는 듯한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린 것이다.


ⓒGAINAX /Project Eva /TX. All Rights Reserved.

철학적 소재를 가지고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안노감독의 상술이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향후 일본 아니메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에바가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은 대단하다. [라제폰] 역시, 훌륭한 퀄리티와 진지한 구성면에 있어서 탁월한 작품임에도 [에바]의 그늘에 가린 채, 유사품처럼 취급받는 것도 [에바]가 지닌 잔광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라제폰]은 [에바]가 아니다!

왜 [라제폰]은 항상 [에바]와 비교선상에 놓이는 불운을 지니게 된 것일까? 하필 다른 로봇물도 많은데 말이다. 굳이 그 이유를 꼽으라면 [에바]의 등장인물들과 오버랩되는 캐릭터의 성격, 알 듯 모를 듯 모호한 주제의식, 선악의 개념을 알 수 없는 존재간의 대립 등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푸른피, 뮤리언, 도렘, 라제폰, 연주자... 난해한 상징적 코드의 나열 역시 [에바]와 흡사하다


사실 [라제폰]의 주인공 아야토는 [에바]의 신지처럼 자신이 원해서 파일럿이 된 존재가 아니다. 평범하고 조금은 소심한, 고등학생에 불과한 소년이 지구의 운명을 짊어질 사건의 중심에 들어와 있다는 설정 자체가 [에바]와 상당히 흡사하다. 그의 조력자 하루카는 마치 [에바]의 미사토를 연상시키며, 그녀의 동생이 메구미의 발랄한 성격은 [에바]의 아스카를, 그리고 신비의 소녀 쿠온은 아야나미 레이의 이미지와 매우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어차피 일본 애니메가 거기서 거긴데, 비슷할 수도 있지 뭐...라고 말한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긴 하다.

[라제폰]이 [에바]의 유사품 취급 받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마치 에바가 미지의 생명체인 사도와 싸우듯, 정체불명의 적인 '도렘'과 싸우는 라제폰은 서로 닮은점이 많다. 도렘을 보내는 MU를 악의 근원으로 단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점에 있어서 선과 악의 개념은 상당히 모호한 상태다.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이렇듯, [에바]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요소가 [라제폰]에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것이 [라제폰]을 단순한 아류작으로 보아도 좋다는 뜻인가? 그건 아니다. TV시리즈의 종료후 두차례에 걸쳐 극장판을 내놓았음에도 그 결말에 대해 무수한 추측과 의문만을 남기고 사라진 [에바]에 비해 [라제폰]은 비교적 해피하면서도 심플한 엔딩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결말은 기복없이 꾸준히 연결되어 온 극의 흐름과 무난한 융화를 보여주었다.

다만, [라제폰]은 [에바]와 같은 절대적인 상징성을 지닌 아니메가 되진 못했다. 훌륭한 작화, 박진감 넘치는 전투씬, 수준급의 음악, 드라마의 구성 등 뭐하나 [에바]에 꿀릴 만한 점은 없었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데는 사실상 실패했다.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단적으로 말해 [라제폰]은 시기를 잘못 타고난 불운의 작품이다. 시대적으로 [에바]는 관객들에게 '쇼크'를 줄 만한 파격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 [라제폰]처럼 어렵고, 진지한 분위기의 작품은 이미 소외받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에바]정도의 충격요법으로는 멀어져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엔 역부족이 셈이었다.

[라제폰]을 보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굳이 [에바]와의 비교를 염두해 두지 말자. 여러가주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라제폰]이 시도한 여러 가지 참신한 구성들은 매우 가치있게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음악을 통한 공격이라는 색다른 발상과 시차를 뛰어넘는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신선하면서도 독특하지 않은가?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라제폰을 에바와 구별시켜주는 것은 염장에 가까운 남녀간의 닭살스런 사랑놀음이 아닐런지..


필자가 뽑은 최고의 에피소드는 19화다. 아사히나가 아야토를 위해 지워져가는 기억을 마지막까지 짜내어 그녀의 분신인 도렘과 라제폰의 전투중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장면은 가슴뭉클하게 하는 [라제폰]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준 에피소드였다. 아마 이 에피소드에서 눈물을 쏟지 않은 관객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All Rights Reserved.

개인적으로 최고의 점수를 주고 싶은 19화의 에피소드. 가슴 찡한 감정선의 폭발이 정점에 이르는 애절한 스토리다


다만 결론부분은 25,26화에 있어서는 솔직히 너무 '에바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것도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그 결말이 에바와는 달리 비교적 명료하고 해피엔딩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그 비쥬얼이나 분위기는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제작 당시에 최고 수준의 스탭들이 집결해 기대치를 키워놓은 만큼, 작화적인 면이나 스토리의 전개에 있어서 그다지 손색이 없었음에도, [라제폰]은 무엇인가 공허함을 남긴다. 필자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다수가 느낀 것인지는 몰라도 [라제폰]이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은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대중성을 외면한 작품이 가야할 길은 험난한 것이기에....  



* [라제폰]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2001 BONES. 出渕裕 / Rahxephon project.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신세기 에반게리온(ⓒ GAINAX /Project Eva /TX.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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