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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진실을 결코 개들에게 던져줄 수는 없다

페니웨이™ 2009. 7. 1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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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8점
공지영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그것은 마지막 선고공판이 있던 날의 법정 풍경을 그린 젊은 인턴기자의 스케치기사였다. 그 마지막 구절은 아마도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였던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의 비명소리를 들은 듯했고 가시에 찔린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준비해오던 다른 소설을 더 써나갈 수가 없었다. 그 한 줄의 글이 내 생의 1년, 혹은 그 이상을 그때 이미 점령했던 것이다.

- [도가니] 작가의 말 중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 중에서는 성범죄에 유독 관용적인 한국의 모습을 대변하는 기가막힌 명대사가 송강호의 입을 통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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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 (주)싸이더스/CJ엔터테인먼트. All rights reserved.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


지금으로부터 약 4년전 익산의 불량학생서클인 '끝없는 질주'의 조직원 8명이 한 여학생에게 잔인한 성폭행을 저지른 사건에 대해 학교측이 은폐를 시도한 일로 전 국민이 충격을 받은일이 있다. 이 사건은 성인이 저질러도 용서못할 짓을 학교도 졸업 안한 학생들이 여중생 한명에게 가한 반인륜적인 범죄라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었지만 더욱 충격적이었던건 피해 여학생에게는 이러저러한 핑계로 전학시키는 중징계를 내렸고 정작 가해자에게는 학교측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법원의 판결도 마찬가지였다. 징역형을 선고하긴 했지만 결국엔 집행유해로 풀려나가 가해자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법원이 판결을 통해 학교의 성폭행 은폐사실을 확인했지만, 정작 당시 교사를 비롯한 교육당국자들은 1년이 지나도록 누구 하나 책임지지 않았다. 이 끔찍한 사건을 피해 죄인이 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피해 당사자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더 경악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청각장애인들의 학교인 광주의 인화학교 여중생이 일부 교사와 간부들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폭행 당해온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일반인에 비해 저항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장애인들을 상대로 한 범죄라는 면에서 이 사건은 그 죄질이 아주 극악한 범죄였다.

이 사건은 곧 방송과 매스컴을 타고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으나 이 역시 법원의 판결은 어이없을 정도로 가벼운 처벌에 그쳤다. 어린 장애 여학생 성폭행범들에 대해 `죄를 반성하고 일부 합의했다`는게 그 이유였다. 결국 이 일은 곪을대로 곪아터져 학생들이 교장에게 밀가루와 달걀 물감 세례를 퍼붓는 사태로 치달았다. 가해자는 학교로 돌아오고 피해자는 학교를 떠나야 하는 부조리함이 이번에도 재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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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수첩 게시판 ⓒ iMBC. All rights reserved.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체과 흥미로운 구성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공지영 작가의 신작 [도가니]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 처벌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다. '인화학교사건'을 모티브로 한 [도가니]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청각장애인 특수학교 '자애학원'에 부임한 기간제 교사가 교내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범죄를 고발하게 되는 내용을 담았다.

실제 인화학교사건의 피해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사건 현장의 기록을 수집해 인터넷에 연재된 [도가니]는 소설이라기 보다 한편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그 당시 사건의 정황과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한 이 책은 독자들이 진실에 도달할 수록 잔인한 현실의 모습을 드러낸다. 혐오스럽다는 것 외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든 타락한 노블리스 계층의 부도덕은 새삼 거론하기가 거북스러울 정도이며 피해자들의 대면하는 속수무책의 상황은 마치 내 가족이 그 일을 겪은것처럼 피끓는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분노와 절망. 이 두 단어만큼 [도가니]를 잘 정리할 수 있는 말은 없을 듯 하다. 다른 팩션 소설이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올바른 결말로 이끌기 위해 강요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반면 [도가니]는 현실에서의 절망을 그대로 방치히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범죄사실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나도 분명한 답이 주어진 사건임에도 왜 정의는 집행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함을 느꼈다. 권력과 돈의 더러운 유착관계와 여기에 종교적 위선이 끼어든 불합리한 시스템이 활개치는 이 세상은 이 책의 제목처럼 광란과 충격의 '도가니' 그 자체임을 다시한번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권선징악의 명쾌한 결말로 끝났다면, 이 책의 집필 의도는 그저 작가의 개인적인 만족에 지나지 않을 것이지만 비상식적인 세상에 대처하는 소시민들의 두가지 상반된 모습-도피와 직면-으로 결론을 맺는 결말의 씁쓸함이야말로 현실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딜레마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한다.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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