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고전열전(古典列傳) : 흥부와 놀부 - 재평가되어야 할 한국 최초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페니웨이™ 2009. 5. 1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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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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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좋든지 나쁘든지간에 말이지요. 지난번 소개해드린 [홍길동]의 경우 한국 최초의 컬러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서 현재까지도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론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져 소외 당하는 '최초'의 작품도 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1967년은 한국의 영상 미디어분야에 있어 대단히 의미있는 시기였다도 볼 수 있는데요, 앞서 말한 [홍길동]과 더불어 속편인 [호피와 차돌바위]가 개봉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애니메이션사의 또다른 이정표를 세운 [흥부와 놀부]가 개봉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흥부와 놀부]의 경우는 왜 더 특별한가 하면 이 작품이 일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최초의 스톱모션 방식의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국내에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가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영국의 아드만 스튜디오가 제작한 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시리즈가 소개된 1990년대 중반이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텐데요, 바로 그런 동일한 장르가 1960년대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다는 겁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 Aardman Studio. All rights reserved.

아드만 스튜디오의 세계적인 히트작 [월레스와 그로밋].


하지만 필름 유실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여전히 국내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추앙받는 [홍길동]에 비하면 [흥부와 놀부]에 대한 역사적인 가치는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한국의 고전 중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플롯구조를 지닌 '흥부전'을 소재로 한 작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1950년 이경선 감독의 영화가 최초로 만들어졌고, 이후 1959년 김화랑 감독이 리메이크해 동명의 영화를 선보였으며 이번이 바로 세 번째 작품이었던 것이었지요.

[흥부와 놀부] 역시 전통적인 '흥부전'의 기본적인 플롯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즉, 부유하지만 마음씨가 고약한 놀부와 경제력도 없으면서 아이들은 줄줄히 싸질러 낳은 무능력 동생 흥부와의 갈등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고 있지요. 흥부네 가족은 놀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나 밥굶기를 밥먹듯 하던 중 우연히 구해준 제비님이 박씨를 가져와 흥부네 집에 부귀영화를 안겨준다는 뭐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 한국 영상자료원/ 블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흥부전의 내용이야 모르는 분들이 없으시겠지만 [흥부와 놀부]에서는 전체적인 내용 외에도 원작의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가령 흥부가 놀부 집에 돌아가 밥을 구걸할 때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이나 쌀값을 장만하기 위해 김부자 대신 곤장 서른대를 맞으러 가는 에피소드 등은 의외로 기억에서 쉽게 사라질 법한 작은 사건임에도 이 작품에서는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 한국 영상자료원/ 블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쌀을 빌리러 간 흥부가 형수에게 주걱으로 싸대기를 맞는 명장면. 인물은 물론 배경의 디테일적인 우수함에 새삼 놀라게 되는 장면이 한두개가 아니다.



또한 본 작품은 동화적 분위기로 시작해 급기야는 괴수물과 호러물의 장르까지 넘나드는 버라이어티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아마도 당시 기준으로 보건데 클라이막스에 출연하는 호랑이라든지 용, 처녀귀신등의 등장에서 아이들이 많이 무서워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 월트 디즈니 식 동물 캐릭터들의 활용 등은 [흥부와 놀부]가 꽤나 다양한 부면에서 신경 쓴 흔적을 엿볼 수 있으며 더불어 음악을 담당한 최창권 감독이 판소리를 중심으로 편성한 사운드 구성과 '오빠 생각'을 편곡한 삽입곡의 센스는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쪼륵쪼륵 쪼르륵 배에서 울고

쪼륵쪼륵 쪼르륵 슬피 울건만

우리 아빠 걸어서 큰 댁 가시면

쌀가마니 가지고 오신다더니


- [흥부와 놀부] 중 흥부네 자녀들이 쌀을 빌리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부르는 노래



연출을 담당한 강태웅 감독은 일본 덴츠 사의 인형 영화 감독으로 일하던 모치나가 타다히토(일본에서 처음으로 인형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이로 중국에도 가서 인형 애니메이션을 연구, 후에 스튜디오까지 세운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터이다)의 밑에서 기술을 습득한 유학파로서 후에 [콩쥐팥쥐]라는 또한편의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 한국 영상자료원/ 블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당시로서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텐데 각 캐릭터의 동작 하나 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흡사 요즘 작품을 보는 것처럼 표현력이 우수하다는 점은 [흥부와 놀부]가 왜 이렇게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진 작품이 되었는지를 다시한번 의아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30만 관객을 동원한 [홍길동]과는 달리 고작 16000명에 그친 흥행실패[각주:1]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한국 영상자료원/ 블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어쨌거나 [홍길동]에 이어 이번에도 반복되는 얘기겠습니다만 문화 컨텐츠 이전에 '돈'을 우선시하는 한국 문화계의 풍토는 이렇게 우수한 작품마저 기억 저편으로 묻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만 셈입니다. 심지어는 발군의 연기력을 보여준 성우들에 대한 정보조차 구할 수가 없더군요. (혹시 알고 계신분은 저에게 제보 바랍니다) 정말 한국이란 나라는 가치있는 것을 가치있게 보존하지 못하는 우수한(?) 민족이라고 밖에는....

한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흥행실패와는 달리 [흥부와 놀부]가 제5회 청룡영화상 비(非)극영화 부분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점이며 최근에는 판권문제도 해결되어 DVD로도 출시되었고 VOD 서비스로도 비교적 손쉽게 관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42년의 세월을 무시할 수는 없는 듯 DVD의 마지막 6분 정도는 영상과 음성의 싱크가 심하게 맞지 않는 현상이 생겨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나마 양호한 화질과 음질의 필름이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야 할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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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상자료원/ 블루미디어. All rights reserved.




* [흥부와 놀부]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한국 영상자료원/ 블루미디어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월레스와 그로밋 (ⓒ Aardman Studio. All rights reserved.)


  1. 사실 이 부분에 대해 강태웅 감독은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후속작인 [콩쥐팥쥐]까지 무려 10년의 공백이 있었다는 점을 보면 투자자들을 납득시킬만큼의 흥행성적이 아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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